대선 후보 첫 토론이 뜨겁게 이어졌던 26일 밤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이 세금보고서를 공개하지 않는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를 몰아세웠다. 도대체 왜, 무엇을 숨기는가? 아마도 트럼프가 자신이 말한 만큼 부자가 아니거나 주장한 만큼 기부를 덜해서인가…몇 가지 이유를 추론하던 힐러리는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 “자신이 연방소득세를 안냈다는 것을 미국민들에게 알리기 원치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음 순간, 열 받은 트럼프에게서 믿기 힘든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그렇다면) 내가 스마트한 것이지”
자신의 실언을 깨달은 트럼프는 토론 후 세금을 냈다고 주장했다. 그의 납세여부는 세금보고서가 공개되면 확실해질 것이다. 설사 한 푼 안냈다 해도 부유층에 관대한 맹점 많은 절세규정을 스마트하게 활용했을 뿐 위법사안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대선후보가 자신은 똑똑해서 세금을 안냈다고 거의 인정해버린 후였다. 근로계층의 어려움에 공분한다는 억만장자 후보가? “청소부도, 교사도, 모두가 세금을 낸다. 세금을 안내야 스마트하다면 나머지 우리들을 뭔가? 불쾌하고 화가 난다” - 그날 밤 부동층 유권자들이 모인 포커스그룹에서도, 다음날 힐러리 유세장에서도 비난이 들끓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납세반대 그룹에서조차 “내야할 세금은 다 냈다” 정도로 말했어야 한다고 혀를 찼다.
자신에 대한 비판에 유난히 민감한 트럼프가 힐러리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어버린 것이다.
“어떤 트럼프가 나타날까”는 첫 토론의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로 꼽혔었다. 그러나 이날 밤 등장한 트럼프는 기대했던 ‘대통령다운’ 후보도, 무차별 맹공격의 선동가도 아니었다. 예상 질문에도 횡설수설하며 제대로 된 공격은커녕 수세에 몰려 허둥대는, 또 다른 트럼프였다.
대통령다운 후보는 따로 있었다. 한국과 일본, 나토 동맹국들의 안보 무임승차론을 거론하며 그들이 돈을 더 내지 않으면 미국도 동맹국들을 더 이상 방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트럼프의 주장을 들은 후 힐러리는 트럼프가 아닌, 난감해 하는 국제사회를 향해 확신을 주려는 듯 다짐했다. “전 세계 많은 지도자들이 이번 선거를 보며 우려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나는 내 자신과 다수의 미국민을 대신하여 우리의 약속이 유효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흐뭇한 힐러리, 씩씩대는 트럼프’ ‘힐러리, 트럼프를 약 올리다’ 등 다양한 토론보도 제목 중 개인적으로 가장 눈길이 끌린 것은 “준비 안 된 남성이 훨씬 잘 준비된 여성에게 소리를 질러대다”였다. 온라인 정치분석 사이트 ‘복스’의 타이틀이다.
이번 토론의 승패를 가린 것은 ‘준비’의 유무였다. 힐러리는 철저히 준비했고 지나친 준비는 위험하다며 모의토론도 거부했다는 트럼프는 준비부족이 여실해 보였다.
‘준비’는 지난 한 두주의 토론 연습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한 나라의 최고 공복이 되려는 두 후보가 각기의 분야에서 얼마나 자질을 쌓아왔나에서 시작하여 최소한 출마를 선언한 후부터, 아니, 자당의 대선후보가 된 후부터라도 대통령 직의 사명과 의미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했는지, 국정의 기본지식을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까지 모두 다 포함된다.
그것이 토론준비로 유세까지 중단했느냐는 트럼프의 야유에 “맞다, 나 토론 준비했다. 그런데 또 내가 무엇을 준비했는지 아느냐? 대통령이 되는 준비다”고 맞받아친 반격이 이날 밤 힐러리 최고의 순간으로 꼽힌 이유다.
여러 후보들이 북적 댄 공화경선 토론의 무대에선 한 마디 펀치만으로도 라이벌들을 녹다운 시키며 군림할 수 있었지만 콘텐츠 부족한 트럼프에겐 자신의 정책 설명과 상대의 집요한 공격에 깊은 지식을 근거로 대응해야할 본선의 일대일 토론은 전혀 쉬워 보이지 않았다.
반짝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자리 ‘훔쳐가는’ 자유무역협정을 비판하며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을 처음엔 반대하다 지지로 돌아선 힐러리의 말 바꾸기를 공박할 때, 힐러리가 개인 이메일 사용을 “실수였다”고 간결하게 해명하자 “그건 실수 이상이다, 고의였다”고 지적했을 때, 오바마와 힐러리의 중동정책을 비판했을 때…그러나 지적만 했을 뿐 상대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신랄한 공격으로 이어가는 데는 실패했다.
여유있는 태도로 계속 찔러대는 노련한 힐러리의 페이스에 말려들면서 그의 취약점은 차례차례 민망하게 드러났다. 인종문제에서 사이버 안보, 국제외교와 여성문제에 이르기까지 논리적 공격보다는 동문서답과 뻔한 거짓말, 무례한 끼어들기로 자충수를 거듭하는 그가 허점을 보이는 순간 힐러리는 놓치지 않고 강펀치를 날렸다.
토론의 승패는 명백했다. 여론조사도 63% 대 27%로 힐러리의 손을 들어주었다. 대선토론 여론조사가 실시된 이후 92년 빌 클린턴과 2012년 밋 롬니에 이어 사상 3번째로 큰 차이의 압승이다. 문제는 이 차이가 지지율 상승과 대선의 승리로 이어질 수 있는가이다. 클린턴은 승리했고 롬니는 패배했다. 그러나 토론 직후 클린턴 뿐 아니라 롬니도 4포인트가 넘는 지지율 상승을 얻어냈다.
대선예측 전문가 네이트 실버는 만약 힐러리의 지지도가 앞으로 며칠 내에 이들처럼 오르지 않으면 “민주당은 두려워해야한다”고 경고한다.
그래도 이성과 상식이 미 정치의 저력이라면 이번 토론은 트럼프에게 치명타를 입혔을 것이다. 그러나 자질부족이 명백하게 드러난 토론의 참패로도 지지율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트럼프를 이길 것인가. 정말 예측불허의 이상한 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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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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