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나라 황제이자 천하장사 항우가 끈질기게 추격하는 유방의 한나라 군대와 마지막 일전을 벌인다. 아무리 항우라도 겹겹이 둘러친 한나라의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오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포위망을 좁히던 한나라 대장군 한신은 피곤에 지친 초나라 군인들의 사기를 꺾기위해 심리전을 펴기로 하고 한나라 군인들에게 슬픈 곡조의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한다. 죽음의 공포에 떨던 초나라 군인들이 속속 탈영 한다. ‘고군분투’ 사방의 전투에 지친 항우가 우희라는 여인의 위로를 받으며 술잔을 기울일 때 이 노래를 듣고 슬픔과 좌절에 빠졌다는 내용이다. ‘사면 초가’. ‘4면에 초나라의 노래’라는 뜻으로 아무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외롭고 곤란한 지경에 빠진 상황을 설명할 때 빗대어 쓴다.
요즘 미국의 형국이 이렇다. 안으로는 경찰의 흑인 총격, 이에 항의하는 폭동, 스포츠 스타들의 국가 존경심 표현 거부, 제조업 소멸로 인한 전통 공업지대 붕괴, 불체자 문제, 테러 등등. 밖으로는 각종 ‘굴기’(일어서다는 뜻)를 앞세운 중국의 도전, 러시아 푸틴의 막무가내 식 도발, 해킹, 이란의 시비, 북한 김정은의 잇단 핵 위협, 시리아-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의 테러와의 전쟁. 하나같이 만만히 볼 것이 없다.
북한의 김정은은 정권 장악 4년 만에 무려 25번의 미사일 실험을 강행했다. 앞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집권 18년 동안 18번의 실험에 그쳤다. 총 5차례의 핵실험 중 3번은 김정은의 작품이고 올해 들어서 만 2차례나 실시했다. 중국의 비호와 한국 (좌파로의) 정권교체에 희망을 걸고 있는지 막판 핵무기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이 전략 폭격기를 띄우고 위협 시위를 벌여도 “브러핑(허세) 한다”고 비웃기만 한다. 선제 타격론이 거론돼도 실행에 옮기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중국은 미국이 15년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서 전쟁을 벌이는 동안 미국에 싼 물건을 팔아 번 돈으로 미국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중국의 고속성장이 7%대의 성장률로 떨어져 경기 침체가 우려된다. 하지만 중국 경제에 침식당한 미국 경제는 독감에 걸릴까 전전긍긍하는 모양새다. 중국이 남중국해 암초에 군사기지를 건설하며 힘으로 장악해도 미국은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다.
흑해 공해상에서 미군기와 함정에 근접비행하며 위협을 가하는 러시아 전투기들, 호르무즈 해협의 공해 상을 항해하는 미군 함정의 진로를 방해하며 시비를 걸어대는 이란의 쾌속정들, 곳곳에서 미국을 자극하는 적대 행위가 계속돼도 미국의 속 시원한 대응책이 마땅치 않다. 최근 G20 정상회담 참석차 중국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제대로 된 의전도 없이 골탕 먹인 중국, 오바마 대통령에게 쌍욕을 퍼부은 우방국 필리핀 대통령의 무례한 행동은 미국이 얼마나 ‘얕잡아’ 보이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분통터지는 대목들이다. 미국이 아직 세계 최강인가에 대한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11월 미국 대선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도 이런 것 때문이다. 미국 안팎에서 도전장을 내미는 각종 현안들을 슬기롭고도 미국적으로 해결할 강력한 지도자가 간절하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후보가 없다는 점이 문제다.
워싱턴포스트는 “클린턴은 2004년 재선에 도전한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만큼 인기가 없고 트럼프는 비 백인 유권자 중 비호감률이 1964년 배리 골드워터 후보 이후 최고”라고 보도할 정도다. 클린턴과 트럼프의 비호감 비율이 56%대 64%나 될 지경이다. “내가 좋아하는 후보”를 뽑기 보다는 “후보가 싫어 다른 후보를 찍는” 선거가 되고 있다.
클린턴은 낡고 믿지 못할 정치인의 이미지가 굳어져 가고 있고 트럼프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후보로 믿음이 가질 않는다.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는 클린턴과 트럼프간의 첫 토론회가 다음주 월요일(26일) 열린다. 양 후보가 이날 어떤 말을 주고받고 어떻게 공방을 벌이느냐에 따라 유권자의 막판 표심에 불을 당길 것이다. 건강 이상설과 이메일 파동, 클린턴 재단 비리 의혹 등의 난제에 시달리며 지지율을 깎아 먹는 클린턴의 재기냐 아니면 거침없는 공약과 발언으로 작두를 타는 기분이지만 시름에 빠져 있는 미국인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트럼프의 질주냐. 이번 첫 토론회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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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섭 부국장·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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