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왔을 때, 가방에 든 것은 단돈 3천불이 전부였다. 당시에는 (정부의 외화반출 금지 정책때문에)더 가지고 나오고 싶어도 가지고 나올 수가 없었다. 까짓거 가서 맨땅에 헤딩이라도 하지… 당시에는 모두 그런 배짱으로 이민가방을 쌌다. 사람이 정든 땅을 떠나 올 때는 누구나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가난이든 한이든, 억울함이든 혹은 환상이든….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아버지의 말씀대로 ‘속아서 왔소’였다. 그나마 막노동이라도 하면서 적응해 나갈 수 있었지만, 한동안 눈물의 빵을 씹지 않으면 안됐다.
그냥 한국에 남아 있었더라면 더 나았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이곳에 와서 변한 것이 있다면 다소 애국자가 되어버린 것이라고나할까. 도산 안창호 선생도 아니면서 무슨 대단한 독립 운동가라도 된 것처럼 괜스리‘대한독립만세’다 아니, 남북통일… 민족의 부국강병을 목이 터져라(?) 외치고 기원하게 됐다. 싫다고 떠나올 때는 언제고 왜 갑자기 애국자가 되어버린 것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너무 많은 다른 것… 타민족과 이질 문화 속에 치어살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정체성을 찾고 싶은 본능 때문은 아니었을까? 예전엔 몰랐던 것이 멀리 떨어져서 살다보니 그립고 아쉬운 것들 뿐이었다. 고리타분하게만 보였던 한복입은 여인네들… 답답하고 싫기만 했던 유교적인 예의와 관습… 거추장스럽게만 느껴졌던 사람 사는 끈끈한 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의 가을하늘과 고추잠자리가 무지무지 그립다. 무너진 초가산간… 아니, 한들거리는 코스모스의 안개… 그 어른거리는… (이제는 더 이상 가 볼 수도 없는) 꿈 속의 고향이… 무서리의 세월 속에서 한없이 가슴을 아련하게 하곤한다.
America… 한국, 중국에선 美國, 일본에선 米國으로 표기한다.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보기에 따라서 아름다운 美國이 될 수도 있고, 단순한 곡창지대(米國)에 그칠 수도 있겠지만 신세계 교향곡의 작곡가 드보르작은 미국에 와서 이 광활한 대지가 원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땅이었다는 것, 그리고 흑인들의 恨과 인디언들의 혼의 살아 있는 곳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드보르작은 원래 체코의 잘 나가는 작곡가였지만 뉴욕 국립 음악원이 제안한 연봉 1만5천불은 당시로선 거절하기 힘든 거액이었다.
그러므로 드보르작도 우리처럼 아메리카는 기회의 땅, 즉 살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그저 무작정, 이곳으로 이민 온 것일까? 미국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드보르작은 상상할 수 없었다. 드보작은 체코에서 이미 유명했지만 그가 상징하는 바 최고의 작품들은 모두 미국에서 탄생했다.
안익태 역시 유럽에서 에키타이 안이라는 (일본)이름으로 활약하기도 했지만, 이민자의 삶 속에선 (단연코)매국(친일)은 없다. 인간이란 떠나보지 않으면, (즉 방황과 방랑이 없으면) 삶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다. 뉴욕 음악원 재직시(1891-1895) 드보르작이 보았던 것은 단순한 음악인으로서의 어떤 멜로디의 창조가 아니었다. 그것은 광활한 대지 속에서 인류의 모든 삶에 주어진 대자연의 합창… 드넓은 우주적 가치와 슬픔을 딛고 일어서려는 보편적인 숙명… 음악으로 보여진, 신의 또다른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꿈 속에서 악마의 연주를 듣고 ‘악마의 트릴’이라는 작품을 남긴 타르티니의 ‘음악적 영감’은 다소 섬뜩하지만, 청각의 장애를 딛고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킨 베토벤, 스메타나 등의 이야기는 무한한 감동을 준다. 보헤미아의 드보르작은 매우 훌륭한 작곡가였지만 아메리카의 드보르작은 또다른 모습의, 드보르작이었다.
기차를 좋아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던 드보르작은 이 광활한 대지에서 무진장한 홈시크를 겪었는데, 그것은 어딘가 진달래 먹고…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하모니카를 불던 우리들의 모습으로… 친근하게 어필한다.
텅빈 가슴앓이 속에서도 흑인 영가의 이해, 인디언들의 향토음악의 재발견, 그들과 함께 어우러져 만든 from 아메리카(신세계 교향곡, 첼로 협주곡, 아메리카 현악4중주)야말로 단순히 이를 남긴 작곡가의 이름에 앞서 아메리카가 남긴 고유명사, 그 진정한 향토적… 우리 모두의 향수(의 노래)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내 훌쩍 지나버린 한가위. 달뜨는 저녁에 드보르작의 from 아메리카… 를 들으며 향수를 편지 띄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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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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