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여자에게 프로포즈(청혼)하는 모습은 참 로맨틱하다. 아마도 모든 미혼여성들이 동경하는 장면일 터이다. 하지만 그렇게 무릎 꿇은 모습이 항상 보기 좋은 건 아니다. 요즘 전국 풋볼구장에서 게임 전 국가봉창 때 국기를 향해 일어나 가슴에 손을 얹는 전통의식을 거부하고 멀거니 꿇어 앉아 있는 선수들이 늘어나 논란을 빚고 있다.
풋볼시즌 개막과 함께 흑인선수들 사이에 번지고 있는 이 새 풍속도의 발단은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SF 49ers)의 후보 쿼터백인 콜린 캐퍼닉(28)이다. 흑백 혼혈인 그는 이미 지난달 프리시즌 경기 때부터 “흑인과 유색인종을 억압하는 나라의 국기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국가 연주 중 일어설 수는 없다”며 앞으로의 경기에서도 일어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정규시즌 첫 주말경기가 일제히 벌어진 지난 11일 무릎 꿇은 선수는 캐퍼닉만이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9?11 테러사태 15주년 기념일로 경기장마다 희생자들의 추모 분위기가 고조됐던 이날, 마이애미 돌핀스의 스타 러닝백인 애리안 포스터를 비롯한 4명이 무릎 꿇었고 하루 뒤 ‘먼데이 나이트’ 경기에선 캐퍼닉의 동료 에릭 레이드도 그와 나란히 무릎 꿇었다.
덴버 브롱코스의 브랜든 마샬은 이미 지난주 시즌개막 경기에서 무릎을 꿇었다. LA 램스와 캔자스시티 치프스 소속 선수 5명은 국가연주 중 일어섰지만 머리를 떨군 채 검은 장갑 낀 한쪽 주먹을 하늘로 추켜올렸다. 지난 1968년 멕시코 올림픽경기 시상대에서 미국 흑인 육상선수 존 칼로스와 토미 스미스가 처음 선보인 인종차별 항의 패턴을 본 딴 것이다.
물론 캐퍼닉과 그 추종자들에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국기와 국가에 대한 배신이며 역대 모든 미군 및 9?11사태 희생자와 가족들에 대한 모독행위라고 비판했다. 게임도 시작하기 전에 기분 잡쳤다며 다른 데 가서 항의하라고 나무라는 관객도 있었다. 심지어 한 연방의원은 캐퍼닉의 여자친구가 무슬림이라며 IS가 배후에서 조종한 것 같다고 비아냥했다.
하지만 이들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캐퍼닉이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행사했고 그의 항의 이유도 토론해볼만한 주제라고 말했다. 칼로스 본인은 물론, 그를 흉내 내 주먹질한 LA 램스 선수들도 구단주가 감싸줬다. 미국국가는 통상 1절만 봉창되지만 3절 가사엔 노예에 관한 언급이 버젓이 포함됐다고 꼬집는 사람도 있다.
알고 보면 캐퍼닉보다 훨씬 앞서 무릎 꿇은 풋볼선수가 있었다. 덴버 브롱코스의 명 쿼터백이었던 팀 티보(29)는 경기 중 수시로 무릎 꿇었다. 항의 아닌 기도를 위해서였다. 그는 언제나 ‘아이 블랙’(눈밑 먹칠) 위에 흰 글씨로 ‘John 3:16’(요한복음 3장16절)이라고 쓰고 출전했다. 기도하는 그의 모습을 뜻하는 ‘티보윙(Tebowing)’이라는 단어까지 생겨났다.
고교시절 야구선수였던 티보는 지난 8일 프로야구팀 뉴욕 메츠의 마이너리그 팀과 입단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풋볼선수 시절 ‘티보윙’ 때문에 크게 비난 받지 않았지만 그를 흉내 낸 시애틀 근교 브레머튼의 한 고교 풋볼팀 코치는 해고당했다. 그가 경기종료 후 구장 중앙에서 선수들과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한 것은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애국가 제창 때 입을 꽉 다문 좌파 국회의원이 욕을 먹었다. 애국가 자체를 부정하고 북한 군가인 ‘적기가’를 부른 것으로 알려진 이석기 전 의원(통합진보당)은 2014년 내란 선동죄로 9년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를 비호하는 일부 좌파진영은 공식행사에서 국가를 부르는 나라는 한국과 미국뿐이라며 ‘시대착오적 허례의식’을 중단하라고 주장한다.
앞으로도 무릎 꿇는 풋볼선수들은 늘어날 터이다. 미국의 전체 프로풋볼 선수 중 3분의2가 흑인이다. 엊그제는 미국 여자 축구 대표팀의 미건 래피노(백인)도 무릎 꿇었다. 그러나 정반대 현상도 볼 수 있다. 시애틀 시혹스 소속 50여 선수는 11일 경기 때 국가 연주 중 전원이 일어나 서로 팔짱을 끼고 성조기를 향해 섰다. 미국은 참으로 재미있는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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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시애틀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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