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남자 애들은 싫어 하나? 어렸을 때 소꼽장란은 재미있었다. 소꼽장란이 상상 속의 행위였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만약 내가 어른이라면, 만약 내가 엄마라면, 만약 내가 의사라면, 만약 내가 배우라면, 만약 내가 공주라면, 만약 내가 지휘자라면, 그런 상상을 바탕으로 벽돌가루 빻아서 김치도 담그고 작대기 하나 들고 머리채 휘두르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시늉도 했었다.
성경필사를 시작한 건 어느 정도 그런 소꼽장란을 하는 마음이었다. 조금 겸연쩍기는 했지만 수녀나 수사 같은 생활을 소꼽장란 시늉처럼 해보고 싶었다. 나는 단체 생활에 영 소질이 없고 또 규칙 지키는 일과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늘 힘들었다. 언제든 내가 좋아하는 걸 자발적으로 해야 뭐라도 할수 있었기에 그 서릿발같은 규칙의 성직자의 생활이란 상상의 여지도 없는 삶이지만 그렇다고 꿈도 못 꿔?
중세 시절엔 다른 일 하나 안하고 오직 허구헌날 성경만 필사 하는 수사가 있다던데. 일생을 성경 베껴쓰기만 하는 일이라면 나도 할 자신 있다, 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공책에 쓰는 건 재미없어서 이왕이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 롤로 되야 의미도 더 할 것 같아 1500 피트의 두루마리에 필사를 시작했다. 어느 날은 하루종일 쓰고 어떤 땐 일주일 동안 손도 대지 못하고, 그냥 되는대로 썼다.
그런데 꽤 재미있었다. 어렸을 때 왜 단어 열번씩 쓰는 숙제를 안해가서 매맞는 오욕을 당했나 후회될 지경이었다. 엄마가 하라고 닥달하지 않는 일들은 왜 이리 재미있을까?느지막 나이에 내가 벌린 소꼽놀이를 보며 어떤 사람들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그거 왜 해요? 하고 묻는 이도 있었다.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나를 곰곰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우리가 사는 일이 전부 그거 왜 해요? 하는 질문을 받을 일을 반복하며 살고 있다는 걸 아주 선명히 깨닫게 되면서 그게 뭐든 사는 일들이 더 놀이 같아지고 더 재미있어졌다. 우리가 사는 일에 왜 하냐는 질문에 똑 떨어지는 답을 줄수 있는 일이 있을까?
내일이면 더러워 질 건데 왜 청소해요? 산에 가서 뭐해요? 달리기 해서 뭐해요? 합창해서 뭐해요? 손자 왜 이뻐해요? 왜 그림 그려요? 봉사활동 왜 해요? 모든게 바람같이 먼지같이 사라져 버릴지언정 살아 있는 날까지는 모두가 다 자기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사는 게 인생이다. 아무튼 하다보니 요한묵시록까지 다썼다.
자, 그럼 이걸 갖고 광야로 나가 한번 펴볼까? 허황된 일이기도 하고 그거 왜 하냐는 질문에 딱 들어 맞는 일인데도 한번 펴보고 싶었다. 날짜를 써 놨기 때문에 아하, 언제 이거 썼구나, 지난 봄엔 이 대목을 썼네? 쓰는 동안 흐른 시간을 다시 반추해보고 싶었다고 할까? 그런데 무게도 만만치 않고 나 혼자 할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스을슬 곁의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나같이 사는 일이 소꼽장란같이 생각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은건지 내 소원이 이루어져 몇몇이 함께 데스밸리로 가게 됐다.
사진사, 비디오 찍어 줄 사람, 두루마리 펼쳐줄 사람. 아니 이렇게 일이 술술 풀려도 되는 일인가? 이게 아주 싱거운 일인데, 콧방귀 뀔만한 일인데... . 아무튼 날짜도 정하고 숙소도 잡고 차편 계획도 서고, 길을 나서며 그래도 믿기지 않았다.
날씨는 쾌청했고 오랜만에 잡아보는 운전대의 감촉이 산뜻했다. 멀리 언덕위에서 언제봐도 설치 미술처럼 보이는 바람개비들이 반가워 인사를 나누는데 엔진 소리가 심상찮다. 쾅쾅 때리는 게 불길한 예감. 그리고 드디어 사막 한가운데서 차가 섰다.
아직 풀워런티도 있는 차에다 때맞춰 첵업해주는 딜러의 서비스도 제때 제때 받아온 차여서 차가 서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거늘. 어쩐지 일이 정말 스무스하게 풀린다 싶었다. 가기 전, 누가 바람 불면 어쩌냐고 걱정하길래 내가 쿨하게 ‘되가는 대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고 폼재며 대답했는데 내 폼을 보고 웃음을 참던 하느님이 결정적인 순간에 무소불위의 능력을 보여주신 것 같다. 봐주시는 김에 끝까지 좀 봐주시지, 엥! 매정한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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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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