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렴은 상당히 흔한 병이다. 지난 주 폐렴 진단을 받은 힐러리 클린턴이 의사의 처방대로 항생제를 복용하고 휴식을 취했더라면 곧 회복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9일 밤 모금만찬에서 트럼프 지지자 절반을 “개탄스러운” 차별주의자들로 공격했다가 하루 만에 사과하는 설화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고 민주당 대선후보가 길가에서 거의 졸도할 정도로 휘청거리는 모습이 미 전국, 아니 전 세계에 방영되는 굴욕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
후보 자신의 습관적 경계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힐러리 진영엔 함구령부터 내려진 듯 했다. 지난주부터 잦은 기침의 원인을 묻는 기자들에게도, 11일 9.11 추도식장을 급히 떠나다가 쓰러진 힐러리가 어디로 갔는지, 왜 휘청거렸는지에 대해서도 얼버무리며 입을 다물었다. 의사의 폐렴 진단이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은 쓰러진 후 거의 8시간이 지나서였다.
그 8시간 블랙아웃의 대가는 상당했다. 살인적 스케줄에 시달린 후보가 “며칠 아팠다”는 사소한 소식이 24시간 뉴스속보로 비화되면서 케이블TV와 인터넷을 달구었다. 덩달아 터무니없는 음모로 치부되던 “힐러리 대역 동원에서 간질, 치매에 이르기까지” 극우진영의 힐러리 건강 루머에 신빙성이 실리기도 했고 과연 68세의 힐러리와 70세의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격무의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제기되었다.
무엇보다 큰 타격은 힐러리의 고질적 ‘투명성’ 논쟁의 재연이다. 수십년 검증의 잣대에 부대끼면서 공개보다는 비공개를 선호해온 힐러리의 비밀주의가 또 한 번 호된 비판의 도마에 오른 것이다. 이번 건강 해프닝의 결론은 트럼프진영이 계속 시사하는 것처럼 힐러리가 대통령이 되기엔 너무 병약하다는 것이 아니다. 숨길 필요가 없는 것을 마지막 순간까지 숨기려 한 집요한 비밀주의와 그로 인한 신뢰도의 또 한 차례 하락이다.
투명성은 어느 정치가에게도 그리 편안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사적인 건강상태와 재정내역을 공개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대선후보의 건강진단서 제출이 의무사항도 아니다.
뉴욕타임스 사설이 지적한대로 소아마비를 앓았던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휠체어에 탄 사진도 잘 찍지 않았고 4선 캠페인 때는 심장병 사실을 은폐했으며, 젊은 활기의 상징이었던 존 케네디는 실제로는 가장 건강하지 못한 대통령의 한 명으로 애디슨병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숨겼었다. 최근에 와선 달라졌다. 로널드 레이건은 결장암 사실을 공개했고 암을 앓았던 70세 대선후보 존 매케인은 1,000여 페이지의 의료기록을 제출하면서 기자들의 끊임없는 건강관련 질문을 끝내게 했으며 오바마도 위산역류와 인후염 진단을 받았다고 자진 공개했다.
건강문제를 누가 제기하기 전에 잠재우려는 전략이기도 하지만 점점 시대의 변화가 사실 은폐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어서다.
대통령 출마의 순간부터 힐러리든, 트럼프든 그들의 삶은 만인에게 공개되는, 영어의 표현으로 ‘오픈 북(open book)’이 되고 만다. 어디를 가든 수백수천개의 셀폰 카메라가 잡아낸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거의 실시간으로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중계된다. 힐러리의 비밀주의가 아무리 고질적이라도 이젠 설 땅이 없다는 의미다.
공직생활 내내 자신의 ‘사생활’이라고 생각한 영역 보호에 완강했던 힐러리는, 그러나 그 싸움에서 이겨본 적이 거의 없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아칸소 부동산 거래의혹에서부터 남편의 섹스 스캔들, 개인 이메일서버 사용, 그리고 이번 폐렴에 이르기까지 안간힘을 다해 공개 안하고 버티려던 비밀주의는 공익 측면에서는 물론, 그녀 자신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았다.
이번 ‘휘청’ 소동은 타이밍도 나쁘다. 8월 한 달 상승세를 누리며 표밭 유세보다 모금활동에 주력해온 힐러리는 9월 들어 재정비한 트럼프의 맹추격을 받으며 적극적인 유세에 돌입할 계획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첫 후보토론을 앞두고 이번 주엔 ‘정책 대결’을 선거의 프레임으로 정립시키는데 집중하려고 했다. 이번 대선이 예년처럼 정책과 경험과 자질에 비중을 두는 캠페인이 되면 힐러리가 승리한다. 트럼프의 선동에 옆길로 새지 않도록 다잡아야 하는데 시간이 급하다.
황금 같은 나흘을 본의 아닌 병가로 잃어버리긴 했지만 다행히 지원군이 든든하다. 42대 대통령과 44대 대통령이 그녀를 45대 대통령으로 만들려고 팔을 걷어 붙였다. 오늘부터는 병상을 털고 일어나는 힐러리 자신도 클린턴 일가 특유의 ‘컴백 키드’ 저력을 과시할 수 있을 것이다.
성공여부는 ‘재난의 9월’ ‘최악의 주말’ ‘악몽의 48시간’ 등 자극적 헤드라인으로 대서특필되었던 이번 건강 소동의 교훈을 힐러리가 얼마나 뼈저리게 얻었는가에 달렸다. 왜 자신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느냐고 항의하고 불신여론의 근거가 희박하다고 따져봐야 소용없다. 선거의 속성이 그런 것이니까.
“편리해서” 개인 이메일을 사용했고, “별 것 아닌 듯해서” 폐렴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는 힐러리식 해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그 결과에 당당하게 맞서는 정공법만이 표밭의 신뢰를 회복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많은 유권자들이 트럼프를 찍을 수는 없는데 힐러리도 신뢰하기 힘들어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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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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