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년 넘게 병원에서 일주에 4시간씩 자원봉사자로 일한다. 어느 날 나보다 머리 하나 만큼 더 큰 키에 잘 빠진 두 다리, 금발을 휘날리는 젊은 여자가 자기를 산부인과 병실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병원 안내지도를 보면 병동을 쉽게 찾을 수 있을 텐데 왜 그럴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산부인과 병실로 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이르자 그녀는 멈칫하더니 계단으로 가자고 했다. 혹시 꽃뱀이 아닐까? 단둘이 5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내가 몹쓸 짓을 했다고 당국에 고발하여 금전적 보상을 꾀하지 않을까라는 염려로 좀 망설여졌다.
“저 클라우스트로포비아(밀폐공포증, Claustrophobia) 환자예요. 승강기를 탈 수 없어 그러니 도와주세요.”
위급한 상황이 생겼을 때 도망갈 수 없는 좁고 밀폐된 장소에 심한 두려움을 느끼는 정신질환이 밀폐공포증이다. 밀폐공포증은 또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넓은 장소에 홀로 있을 때도 발생하는 광장공포증(Agoraphobia)의 일종이다. 낮선 젊은 여자와 함께 계단을 오르는 동안 나의 옛 환자가 떠올랐다. 그 환자 역시 아주 미인으로 광장공포증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30대 초였던 환자는 우울증을 치료해 달라며 우리 클리닉을 방문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좁은 장소나 확 뚫린 넓은 곳에 혼자 있으면 왠지 기분이 안 좋았다. 사춘기 바로 전에는 먼 친척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적도 있었다. 그 사실을 가슴에 묻어두고 있었지만 항상 수치심이 떠나지 않았다.
그 후부터 수시로 손을 씻고, 목욕도 자주하고, 사람들로 혼잡한 곳에 갈 때는 아는 사람과 함께 다녔다. 고속도로 운전을 할 때도 사고에 대비해 출구가 있는 라인에만 있지 중간라인에는 절대 가지 않았다.
다행히 결혼 후 증상이 거의 없어졌는데 어느날 식품점에서 물건 값을 지불하려고 줄을 서있던 중 갑자기 진땀이 흐르며, 손발의 감각이 없어지고, 숨이 답답하고, 마구 가슴이 뛰고, 가슴팍을 쥐어뜯는 듯한 통증으로 꼭 죽을 것만 같았다. 연락 받고 달려온 남편이 환자를 응급실로 데려갔다.
이런 경우 응급실 의사는 심장질환이나 약물남용, 저혈당을 의심하여 심전도, 약물검사, 혈당을 체크하는데 모든 검사에서 별 이상이 없었다. 의사는 그녀의 증상이 마음의 병에서 오는 것 같으니 정신과 의사의 조언을 받아 보라고 했다.
환자는 정신과의사를 찾는 대신 구글 검색을 하여 공황발작을 동반한 광장공포증이란 자가진단을 붙였다. 구글에 써있는 대로 공황발작이 일어나지 않도록 백화점이나 대형 식품점에 갈 경우 친구와 동행하고, 되도록 엘리베이터는 피하고 계단을 이용했다. 가끔 이유 없이 불안하고 두려운 날들이 있었지만 발작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런데 공황발작이 낮이 아닌 밤에 자주 생기자 우울증에 빠져 정신과의사를 찾은 것이다.
광장공포증은 서유럽과 북미 사람들의 100명 중 5명 이상이 일생 중 한번 이상 경험하며, 유전경향이 있고, 여성에게 많이 나타난다. 심리적 발생원인은 분석이론과 학습이론으로 설명된다. 정신분석학자들은 개인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내적욕망, 충동 등이 무의식 속에 숨어 있다가 어렸을 때 경험한 큰 상실이나 심한 정신적, 육체적 상처와 더불어 어떤 경우 어떤 특정한 대상과 상황으로 변형되어 의식 밖으로 나오는 것이라 주장한다.
반면 학습이론은 어릴 적에 타인들 특히 부모로부터 사람들이 몰려있는 장소에 가면 위험하다는 말을 계속 들었거나, 부모나 친지들이 어떻게 무서움에 대처하는가를 자세히 보고 배우는 과정에서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광장공포증은 공황발작을 경험한 후에 발생한다. 공황발작은 극심한 무서움과 불안상태가 예기치 않게 오면서 식은 땀, 어지러움, 이상감각, 가슴통증, 호흡곤란 등이 따른다. 신체증상은 교감신경계의 항진 때문이고, 심리증상은 편도체의 이상으로 생긴다.
광장공포증은 약물치료와 인지행동치료를 병행하면 치유 성공률이 아주 높다. 약물은 주로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사용하고, 인지행동치료로는 노출요법이 있다.
증세가 심해지면 집안에서만 생활해야 되고, 증상이 만성화 되면 우울증에 쉽게 빠져 자살위험도 있으니 조기에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게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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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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