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였던 빅터 볼거(Victor Borge)는 코미디언으로 더 크게 성공했다. 유대인인 그는 나치학살을 피해 1940년 빈손으로 미국에 이민 왔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지만 영화를 보며 영어를 익혀 코미디언으로 입신했고, 격조 높은 재담에 뛰어난 클래식 피아노 연주 실력을 곁들여 ‘덴마크의 광대 왕자’로 불리며 2000년 사망할 때까지 큰 인기를 누렸다.
볼거의 수많은 비디오 코미디 쇼 중 특히 배꼽을 잡고 나뒹굴며 웃은 게 있다. ‘음성 구두점(Phonetic Punctuation)’이다. 연애소설을 읽을 때 글자와 구두점을 함께 읽어야 감정을 제대로 살릴 수 있다며 쉼표, 마침표, 따옴표, 물음표, 느낌표 등을 각기 다른 음성부호로 만들어 리드미컬하게 낭독했다. 부호의 익살스런 소리와 그의 제스처가 엄청 웃겼다.
그 볼거가 지금 살아있다면 매우 따분할 터이다. 구두점이 존폐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종이 책보다 컴퓨터에 더 익숙한 요즘의 청소년들과 밀레니얼 세대들은 구두점 사용을 기피하거나 그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다. 가장 많이 쓰이는 ‘.’(마침표, period)는 온라인 텍스팅과 채팅 따위의 즉석 문자편지(instant message)에서 이미 사라지고 있다.
구두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예문이 있다. ‘A woman without her man is nothing’이다. 이 문장에 구두점을 찍으라고 하면 남자들은 ‘A woman, without her man, is nothing’이라고 할 터이고, 여자들은 ‘A woman: without her, man is nothing’이라고 할 터이다. 구두점을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여자일 수도, 남자일 수도 있다.
구두점의 역사는 글자만큼이나 길다. 기원전 3세기 고대 그리스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초대형 도서관 사서장이었던 아리스토파네스가 그 시조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이 도서관에 소장된 수십만 개의 희랍어 두루마리들은 대문자, 소문자 구분은 물론 띄어쓰기도 없이 촘촘히 이어져 문장이 어디서 끝나고, 어디서 새로 시작하는지 일반 독자들이 알 수 없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런 글을 읽는 독자들이 쉴 필요가 있는 곳에 점(펑투스)을 찍었다. 현재의 쉼표(,)에 해당한다.
글보다 사자후의 대중연설이 더 효과적 의사표현 방법이었던 그리스-로마 시대엔 구두점이 무시됐지만 5세기 후 기독교 문헌이 쏟아지면서 재등장하기 시작했고, 수 세기에 걸쳐 현재의 구두점이 완성됐다. 한글 구두점은 1940년 체계화됐다.
하지만 문법의 필수항목이 된 구두점은 근래 스마트폰과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의 짧은 텍스팅과 인스턴트 메시지가 보편화되면서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맨 먼저 비운을 맞은 게 마침표이다. 텍스트나 인스턴트 메시지를 받아보는 사람은 영상에 오른 글이 전부이고 이어진 글이 없음을 이미 알기 때문에 구태여 마침표를 찍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구두점 연구가이며 언어학 저서를 100여권이나 출간한 데이빗 크리스털 교수(영국 웨일스 대)는 마침표가 밀레니얼 세대들에겐 빈정댐, 성가심, 불성실, 심지어는 공격을 뜻하는 일종의 이모티콘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말했다.
어떤 부탁 말을 텍스팅 했을 때 상대방이 “Fine”이 아닌 “Fine.”이라고 응답하면 “귀찮지만 마지못해 응한다”는 뜻이 함축된 것이란다.
성경(한글)엔 원래부터 마침표를 포함한 일체의 구두점이 없다. 그래도 읽는데 별로 불편이 없다. 마침표를 생략한 시 작품은 무수히 많다. 내가 매일 만드는 신문의 기사 제목에도 다른 구두점은 쓰지만 마침표는 없다. 크리스털 교수를 인터뷰한 뉴욕타임스 기사도 모든 문장 끝의 마침표를 뺐다. 별로 불편한 게 없어 눈치 못 챈 독자들이 많았을 것 같다.
오는 9월24일은 ‘전국 구두점의 날’이다. 디지털 매체에 밀려 존폐위기를 맞은 구두점을 살리자는 취지로 2004년 샌프란시스코 출판업자 제프 루빈이 제정했다. 그의 취지엔 전적으로 찬동하지만 달걀로 바위 치기일 것 같다. 맞춤법을 무시한 엉터리 글자들이 온라인상에서 판치는 세상에 구두점까지 꼬박꼬박 찍도록 바라는 것은 연목구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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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시애틀 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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