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다소 흥분이 가라앉은 것인가. 조금 과장하면 전 신문지면을 도배질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평양의 금수저 출신이라고 했나. 태영호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 가족의 귀순 기사 말이다.
북한 내 진골(眞骨)격인 빨치산 가문출신이라고 한다. 게다가 탈북 외교관 중 최고위층이다. 그리고 직책상 상당히 많은 고급정보를 지니고 있다. 그런 그의 귀순은 간단히 넘길 일이 아니다. 한국 언론의 흥분도 이해가 된다.
같은 타이밍에 또 다른 탈북자 뉴스가 전해졌다. 의사출신 탈북자의 사망소식이다. 살기가 너무 힘들어 공사장 막일에, 빌딩 청소까지 했다. 그러다가 추락해 숨졌다는 짤막한 보도다.
외교관과 의사 출신의 이 두 탈북자. 그 스토리가 그렇다. 무엇인가 앞으로 다가올 사태를 어렴풋이 예고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북한체제는 곧 붕괴 된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나온 전망이다. 그리고 17년 후 김정일이 사망했을 때도 봇물을 이른 게 북한붕괴론이다. 수령유일주의의 북한체제는 그러나 3대 째 여전히 버티고 있다.
그 학습효과 탓인가. 기사의 행간 행간에 흥분감이 배어있다. 북한의 엘리트 계층들의 잇단 탈북러시 끝에 이루어진 게 태영호 공사 귀순이라는 점에서. 그러면서도 상당히 자제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북한 정권의 핵심층마저 등을 돌리고 있다’는 지적만 할뿐 김정은 체제 붕괴 임박 같은 논평은 애써 피하고 있는 것이다. 태영호 공사의 귀순은 그러면 과연 일과성의 해프닝일까.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곧 이어 소련제국도 붕괴됐다. 그 사태를 예견한 전문가는 하나도 없었다. “우리의 자녀세대에도 소련제국은 건재할 것이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기 전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이 한 말이다.
이란의 회교혁명은 1978년 1월에 이미 시작됐다. 그런데도 카터 대통령은 당시 팔레비 정권이 오래 갈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사태가 발생했다. 뒤늦게 복기(復棋)에 나선다. 그러면 이내 그 변곡점을 찾아낸다. 체제의 불안정성은 이미 곳곳에 드러나 있었던 것. 그러나 현재상황에서 분석가들은 그걸 보지 못한다. 찾아냈을 때는 이미 ‘갈 때까지 간 때’다. 비유하자면 자각증세가 왔을 때 암은 이미 말기에 접어든 것과 같다고 할까.
‘태영호 공사’의 귀순으로 상징되는 북한 엘리트출신들의 잇단 탈북사태는 이런 점에서 수령유일주의 북한이 체제유지에 이미 임계점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부터 시작됐다. 수령절대주의 수호세력과 시장세력의 힘겨루기는. 20여년이 지난 현재 시장세력은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누구나 장마당을 이용한다. 공산당 간부들도 장마당을 통해 부를 축적한다. 장마당은 이제 북한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됐다. 김정은이 개혁마인드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 반대다 장마당을 폐쇄하려들었다. 2009년의 화폐개혁이 바로 그 일환이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북한주민의 경제, 사회생활에서 수령유일주의 세력은 불가피하게 통솔력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다.
시장세력 대두와 함께 체제 상층부도 결국 분해됐다. 오직 핵에만 매달린 김정은의 공포에 의한 폭압정치는 이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그 결과가 엘리트 계층의 동요이고 잇단 탈북이다.
‘그 김정은 체제는 3년을 넘기기 힘들다.’- 전 주한미군 사령관 월터 샤프대장의 지적이다. 웬디 셔먼 전 국무부차관보도 같은 시각으로 이 같은 진단이 김정은 체제 조기붕괴론의 주 배경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고 김정은 체제 붕괴가 바로 해피엔딩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붕괴이후의 시나리오는 더 험난하다. 그 중 최상의 시나리오는 김정은 체제 붕괴가 통일로 이어지는 사태, 독일식 통일이다. 그런데 그 최상 시나리오도 그렇다. 통일한국은 심각한 분파사회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많은 북한 엘리트들은 하층민으로 전락한다. 가장 처절한 상황을 맞게 되는 계층은 현 북한 체제에서도 아웃사이더로 취급받는 ‘성분이 안 좋은 계층’이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때문에 새로운 체제에 적응을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 북한주민은 저임금 노동자가 되면서 계층 간의 골은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이 북한전문가 안드레이 란코프의 암울한 예상이다.
생활고에 허덕이다 추락사한 탈북의사. 그 모습은 그리 멀지 않은 훗날 통일된 한국 사회에서 벌어질 일을 예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래서 스치는 것이다.
평양의 금수저 출신 외교관의 귀순, 이는 김정은 체제 붕괴가 분명히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신호다. 그런데 그 시그널이 왠지 두렵게 들려온다. 사드배치를 놓고 주견이 없어 우왕좌왕이다. 그 한국정부의 외교안보팀이 북한붕괴에는 제대로 대비하고 있는지 상당히 불안해 보여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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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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