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부인회 운영 노인돌봄센터 12곳서 1천300명 고용
미국 워싱턴주 대한부인회 자문이사인 설자 워닉 씨.
"1970년대 미국 워싱턴주 터코마에 있던 한국 여성들의 작은 친목모임이 이제는 12곳의 카운티와 시에 사무소를 두고 1천300명을 고용하는 대형 복지기관으로 탈바꿈했습니다. 모두가 기적이라고 말하죠."
미국 워싱턴주에서 40여년간 대한부인회를 이끌어온 설자 워닉(74) 씨는 21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대한부인회가 성장해온 과정을 이렇게 들려줬다. 그는 오는 24∼26일 제주에서 열리는 제16회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 대회에 발제자로 초청돼 모국을 찾았다.
미국에서 대한부인회가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는 단체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워닉 씨의 일생을 바친 헌신 덕분이었다. 그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달 우리 정부가 주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워닉 씨가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1976년이다. 앞서 그는 한국에 미군 장교로 왔다가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무역회사 직원으로 온 미국인과 사랑에 빠져 1968년 결혼을 했다. 그는 당시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영어교육을 전공하는 엘리트 여성이었던 데다 국제결혼을 백안시했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집안의 반대가 극심했지만, 남편의 지극 정성이 통해 결국 결혼에 성공했다. 한국에서 두 딸을 낳고 10년 가까이 살았지만, 워닉 씨의 부모님이 세상을 뜨자 남편은 미국행을 제안했다.
미국의 명문 유대인 집안 출신인 남편의 설득에 넘어가 이민을 택했지만, 그는 처음 밟은 미국 땅에서 적지않은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그는 우선 미국 사회에 대해 배워야겠다는 마음으로 인근 초등학교에서 무급으로 보조교사 일을 시작했고, 이후 시애틀에 있는 대학교에서 정식 코스를 밟아 20개월 만에 미국 교사 자격증을 땄다. 정식 교사가 된 그는 다시 학교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어려움을 겪는 한인 여성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대한부인회가 이미 있긴 했어요. 그런데 매달 한 번 만나서 밥 먹고 향수나 달래는 친목단체였죠. 거기서 내가 그랬습니다. 이런 모임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어려운 동포 여성들을 돕는 일을 하자고요. 그 지역에 큰 미군 기지가 두 개나 있어서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까지 미군과 결혼한 한국 여자들이 많이 들어왔거든요. 그런데 이들이 영어도 잘 못하고 서구 문화에도 무지하니까 미국 남편들이 깔보고 폭력을 휘둘렀어요. 이들이 폭력을 당할 때마다 통역해주고 돕는 일로 시작해 대한부인회가 봉사단체로 거듭나게 됐습니다."
단체의 활동 폭과 지원 대상이 넓어지면서 회원들의 사비를 털거나 떡, 김치를 팔아 모금하는 형식으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됐다.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고민을 하다 보니까 한인 여성들도 다 미국 시민이니 뭔가 구제하는 방법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내가 80년대 초에 터코마 카운티 복지국에 이사로 들어가게 돼 6년간 일했습니다. 거기서 미국에 다양한 복지기금, 보조금(grant)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워닉 씨는 카운티 당국에 노인 복지 보조금을 신청해 3만5천 달러를 처음으로 받았다. 그 돈으로 대한부인회에서 지역 노인들을 대상으로 무료 급식을 시작했고, 가난한 노인들이 의료 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추가로 15만 달러를 받아내 간병 서비스까지 확대했다. 그렇게 노인 간병 서비스는 대한부인회의 최대 복지사업이 됐다. 현재 대한부인회가 12곳에서 운영하는 노인 돌봄 센터는 300여명의 직원과 1천여명의 간병인을 고용하고 있다.
워닉 씨는 80년대 초부터 14년간 워싱턴 주지사의 아시안 자문위원으로도 일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1995년에는 저소득층 노인을 위한 아파트 건축 사업에 보조금 지원을 신청해 연방 정부에서 220만 달러를 따내기도 했다.
"그 사업을 시작할 때 같이 일하는 대한부인회 이사들도 나한테 미쳤다고 했어요. 나는 밑져야 본전 아니겠냐고 생각했죠. 사실 남을 위해서 일하다 보면 그런 용기가 생겨요. 그 정도의 보조금을 신청하려면 엄청난 분량의 서류를 써내야 하는데, 정말 고생스러웠지만 결국 해냈죠. 내 평생 그때가 최고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파트는 대부분 자식을 따라 미국에 와 어렵게 사는 한국인 노인들에게 분양했어요."
그는 자녀들도 훌륭하게 키워내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맏딸인 안젤라 워닉 씨는 세계 최초의 아시아계 유대교 랍비가 돼 뉴욕에서 가장 큰 유대교회를 이끌고 있다. 둘째 딸은 줄리아드 음대 대학원에서 비올라를 전공하고 현재 유명한 음대인 코번 스쿨에서 교수로 있다.
"아이들에게 '너는 코리안-주이시-아메리칸(Korean-Jewish-American)이다. 세 가지 문화에서 좋은 걸 다 배우고 배울 가치가 없는 건 버려라. 너만의 특별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다행히도 애들이 그렇게 커 줬어요. 특히 맏딸은 순수 유대인 혈통이 아닌데도 신념을 갖고 랍비가 돼 유대교의 개혁과 혁신을 이끌고 있다는 점에 참 자랑스럽습니다."
미국 사회에서 소수 민족으로서 한국인의 입지를 넓히고 다문화 가치를 실현하는 데 몸 바쳐온 그는 한국 사회 역시 다문화에 더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순수혈통을 너무 따지는 경향이 있는데, 지금은 시대가 그렇지 않잖아요. 세계가 변하고 있고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됩니다. 한국이 저출산, 초고령사회로 가면서 나라의 동력이 약해지고 있는데, 좋든 싫든 이민자를 받아들여야죠. 지금부터 다문화정책을 제대로 세워서 그들을 순조롭게 받아들이고 소화해야 합니다. 다문화정책으로는 '샐러드 볼(Salad Bowl)'이 많이 얘기되는데, 미국에서 한국인이 매운 고추로 들어가 맛을 내면서 다른 채소,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 어울린다면 한국에 오는 이민자들도 자기 고유의 문화를 지키면서 잘 섞이도록 도와야 합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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