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고비만 넘으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구나.”4년 전 어머니가 의식을 찾으면서 한 첫 마디였다. 80대 초반 노구로는 감당하기 힘든 대수술을 마친 후 어머니는 한동안 의식이 없었다. 생(生)으로부터 아득한 저편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어머니의 의식이 어서 이쪽으로 돌아오기를, 힘든 고비를 어서 넘기를 우리 형제들은 기도했다.
“저승 문 앞까지 갔는데, 그 문턱 넘기가 이렇게 힘이 드는 구나.”생과 사(死)의 고비에서 어머니는 우리와는 정반대 방향의 고비를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 편의 벽이 너무 높아서 이쪽, 생 쪽으로 돌아오셨으니 ‘이제 되었다’고 우리는 안도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이미 마음을 정하셨던 것 같다. 살았다고 하기에는 기능이 마비된 몸으로 남의 도움에 의존해 연명하는 삶, 그래서 어머니로서 할머니로서 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포기해야 하는 삶을 어머니는 절대로 살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다. 중환자실에서 나오지 못한 채 어머니는 기어이 저편 고비를 넘으셨다.
‘살아야 겠다’ 보다 ‘가야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것 같다. 삶의 끝,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선택이 가능할까. 잘해야 개인적 의지의 영역이던 ‘선택’이 법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세상에는 우리가 두 눈으로 바로 쳐다볼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태양과 자신의 죽음이다. 태양은 빛이 너무 강해서 눈을 멀게 하고, 죽음은 생명이 끝난 상태이니 바라볼 눈이 없다. 태양도 죽음도 영원히 직접 볼 수는 없겠지만 과학의 발달로 이해는 할 수 있게 되었다.
죽음에 대한 의학적 이해가 인간에게 새로운 권리를 부여하고 있다. 의학적으로 회생 가능성 없는 환자들이 불필요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죽음을 선택하는 권리이다. 불치병 환자가 생과 사의 고비에서 도저히 생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없다면 차라리 삶을 끝낼 권리 즉 품위있게 죽을 권리를 주는 것이 보다 인도적이라는 견해가 확산되고 있다.
미국에서 존엄사법이 처음 시행된 것은 1998년 오리건에서였다. 예상 생존기간 6개월 이하인 불치병 환자는 본인이 분명하게 의사를 밝힐 경우 의사에게서 약을 처방받아 죽음을 택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유사한 법이 근년 4개 주에서 연이어 제정되었다. 2008년 워싱턴, 2009년 몬태나, 2013년 버몬트에 이어 2015년 캘리포니아가 합류했다. 가주 존엄사법은 지난해 10월 제리 브라운 주지사가 서명한 후 지난 6월9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법 시행 2개월 여. 죽음을 선택한 환자들의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다. 샌디에고의 한 50대 여성은 루게릭병(근육위축측삭경화증) 말기로 인공호흡기와 휠체어에 의존해 살던 중 6월 중순 존엄사를 택했다. 여성은 6월9일 시행 첫날 처방약을 받기 위해 주치의와 미리 모든 서류작업을 마쳤다고 한다.
지난달 23일과 24일 남가주의 오하이에서는 벳시 데이비스라는 41세 여성의 ‘고별 파티’가 있었다. 그 역시 3년 전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다. 온 몸의 근육이 서서히 마비돼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먹지도 못하게 되고, 마침내 호흡 기능까지 마비되면 죽음에 이르는 잔인한 병, 치료 방법이 없는 병이다.
콘크리트 덩어리같이 굳어지는 몸의 감옥에 갇혀 목숨을 부지하느니 자유롭게 세상을 떠나겠다며 그는 파티를 열었다. 각지에서 모인 가족 친지 30여명과 함께 생의 마지막 이틀을 마음껏 즐기고 언덕 위에 마련된 침상에 누어 석양을 바라보며 그는 준비된 약을 먹었다. 즉시 코마 상태가 되고, 4시간 후 세상을 떠났다.
프리랜서 기자인 여동생이 샌디에고 지역 언론매체에 보도하면서 벳시의 ‘고별파티’는 대표적 존엄사 사례가 되었다.
존엄사에 대한 미국의 여론은 우호적이다. 회복 가능성 없는 환자들에게 고통에서 벗어날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사람이 10명 중 7명꼴이다. 하지만 가톨릭을 비롯한 보수 기독교계의 반대는 완강하다. 피조물에게는 죽을 권리가 없다는 논리이다.
과거 신학생으로 한때 신부가 될 생각이었던 브라운 주지사도 법안 서명에 앞서 고민이 많았다. 만약 자신이 극심한 고통 속에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죽어간다면 어떨까를 생각해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는 존엄사를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준비 없이 맞기에는 죽음이 너무 복잡해졌다. 연명치료가 발달해 사전 의사표시가 없으면 환자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 삶의 질인가, 수명 연장인가 - 미리 선택해두는 것이 죽음 준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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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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