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다운 사랑 한번 해보고 죽고 싶어요.”
오래 전에 만났던 60이 다 된 어느 여자환자의 하소연이었다. 이제껏 살면서 제대로 된 사랑 한번 못한 게 한이란다. 자기 자신마저도 진정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단다.
사랑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사람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사랑은 우리 삶속에 깊숙이 녹아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 받기를 바라지만 사랑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고개를 갸우뚱한다. 사랑에 살고, 사랑에 울고, 사랑에 죽고, 사랑에 웃고, 사랑에 분노하고, 사랑에 후회하고 등등 사랑타령을 하다가 지구촌을 떠나기 마련이다.
우리의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드는 모든 것이 사랑이라 결론내린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의 말조차 알쏭달쏭하다. 사랑은 여러 얼굴을 가지고 전적으로 주관적이며 내면적이기에 각자의 사정과 환경에 따라 그 정의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환자에게 물었다. “사랑을 잃었다고 느낀 적은 있었나요?”“많았죠. 특히 내가 우울증에 빠져 있을 때였죠.”
환자가 원했던 사랑은 단순한 남녀관계를 넘어 자신의 영혼을 흔들어 줄 수 있는 그 무엇을 추구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심한 우울증에 빠져 괴로움을 당하고 있을 때 사랑의 의미를 잠시 알 뻔 했다고 웃음 지었다. 슬픔에 빠진 사람을 돌보아주고 동정심으로 감싸주는 게 사랑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행복할 때 보다 슬픈 마음으로 꽉 차있을 때 사랑에 대해 더 많이 생각했다며 우울증이 한편으론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어주는 모양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랑의 의미를 더 찾아보기 위해 다시 우울증에 빠지고 싶지는 않다고 두 손을 설레설레 흔들었다.
인디애나 주 어느 작은 도시에 36세 된 여인이 살고 있다. 그 여인은 젊음이 넘치던 20세에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마을 교회 예배당에 피아노를 치러 가던 중 차가 미끄러져 길가의 전봇대를 들이 받는 바람에 목뼈가 부러졌다. 그로 인해 목 아래 신체부분은 움직이지 못한다. 사고 후 2년 동안의 재활치료도 단지 팔 안쪽과 손목 부분만을 아주 약하게 움직여 주는 정도였다. 그 때 부터 지금 까지 16년 동안 남들의 도움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하다.
다행히 사고 4년 뒤 착하디착한 고교시절 남자친구가 그녀를 아내로 맞았다. 이제 자동 휠체어를 움직이는 훈련을 받아 자잘한 집안일은 몸소 해결한다. 심한 사고를 당했어도 정상적인 월경과 배란이 가능해 남편은 아내를 설득하여 임신을 성공시킨다. 여인은 정상 분만으로 건강한 세 아이의 자랑스런 어머니가 되었다. 여인은 감각이 없어 아이의 체취를 느끼지는 못하지만 갓난아이를 가슴에 품고 젖을 먹일 때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란 생각이 든다. 언젠가 미국신문에 난 기사다.
나는 젊은 시절 김형석 교수님 수필을 즐겨 읽었다. 교수님의 글이 어느 정도 내 인생의 길잡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교수님이 아직 생존해 계시고, 뇌출혈로 쓰러진 부인이 돌아가실 때까지 20여년 돌보셨다는 사실을 그의 친척이 신문에 게재한 글을 통해 알았다.
환자와 두 분의 이야기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를 준다. 사랑이란 무얼까? 뭐 그리 대단하게 철학적, 문학적, 심리적으로 분석하려고 하면 골치만 아프다. 그저 상대와 함께 웃고, 울고, 기뻐하고, 아파하고, 항상 상대를 지켜주고 싶은 감정이입이며, 그리고 예측 못하는 누군가의 울퉁불퉁한 삶의 길을 포근히 포장해주는 행위로 생각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김형철 교수님의 말대로 인내와 신뢰, 환자 남편의 말대로 동정심과 보살핌은 누군가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사랑의 그림자로서 꼭 따라다녀야 될 듯 싶다.
그러나 사랑은 동정심과 보살핌만도 아니다. 여러 다른 길로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또한 일생에 꼭 한 번만 있는 것도 아니다. 불행한 일을 당한 뒤에도, 병이 들었어도, 우울증에 빠졌을 때도 늘 감사한 마음으로 나날의 삶을 살다 보면 다시 한 번 누군가를 진하게 사랑할 수 있는 기회와 용기가 주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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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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