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회나 기득권층은 수적으로 소수이다. 제한적인 재화와 권력이 소수에 집중돼 있다는 건 곧 불평등을 의미한다. 과거 신분사회에서는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용인했다. 세습이라는 제도와, ‘차별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낡은 가치에 의해 기득권층은 별다른 사회적 저항 없이 자신들이 가진 것을 맘껏 향유했다.
하지만 근대사회로 들어서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기득권은 ‘평등’이라는 새로운 가치와, 법률·정치체제 같은 제도에 의해 규제되기 시작한 것이다. 저항을 피하면서 가진 것을 향유하고 더욱 늘리려면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됐다.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을 선거를 통해 전면에 내세우고, 호의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 모두는 결국 숫자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기득권층의 이런 의도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줘야 한다.
많은 실증적 조사와 연구는 다수의 저소득, 저학력 계층이 이런 역할을 떠맡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가난한 사람들이 기득권 수호의 첨병역할을 한다는 게 언뜻 상식에 배치되는 것 같지만 인간의 본능적 욕망과 선망을 고려하면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어쩌면 이들에게 자신들의 계급적 정체성은 떠올리기조차 싫은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
이런 현상은 지난 2012년 한국 대선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났다. 당시 두 후보가 받은 표는 월 소득 200만원 이하 계층에서는 박근혜 56.1% 문재인 27.6%였다. 500만원 이상에서는 박 40.8% 문 46.4%였다. 학력별 지지율은 중졸 이하에서 박 63.9% 문 23.5%, 대졸 이상에서는 박 37.7% 문 49.6%였다.
몇 달 전 ‘어버이연합’이라는 단체가 경제단체 등으로부터 지원금을 받고 노인과 탈북자들을 각종 시위에 동원해 온 사실이 드러나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이 또한 소외계층 동원을 통해 기득권이 유지 확장되는 전반적 메커니즘의 한 단면이다.
정치평론가인 토머스 프랭크는 지난 2004년 자신의 고향이자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주인 캔사스가 왜 매번 부자정당인 공화당에 압승을 안겨주는지를 규명한 내용의 책을 썼다. 책의 결론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가난한 노동자들의 분노를 경제가 아닌, 도덕과 종교적인 문제들로 돌리도록 한 공화당 전략이 제대로 먹힌 결과라는 것이다. 프랭크의 저술은 가난한 사람들의 계급배반 투표와 관련해 가장 탁월한 분석으로 꼽힌다.
한국의 보수책략가들이 이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의 전략도 비슷하다. 사회 경제적으로 낮은 처지는 박탈감과 분노를 안겨준다. 그런데 보수는 이들의 분노를 자신들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도록 교묘히 유도한다. 그 가운데 이른바 ‘종북세력’과 ‘북한’은 가장 유용하게 써먹는 레퍼토리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보수가 짜놓은 프레임에 맞춰 이런 대상을 향해 자신들의 분노를 맘껏 투사한다. 그러니 가난한 노인들이 일당 2만원 때문에 보수단체들에 의해 동원되고 있다는 시각은 너무 피상적인 관찰이다. 이들이 정말 갈급해 하는 것은 푼돈이 아니라 자신들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인지도 모른다.
미국 대선에서 나타난 트럼프 현상의 저변에도 비슷한 기류가 깔려 있다. 억만장자 트럼프의 기반이 저학력 저소득층 백인이란 건 비밀이 아니다. 이들이 증오를 쏟아내는 대상은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자신들보다 못하거나 나을 게 없는 계층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거지들은 자기보다 수입이 많은 다른 거지는 시기할지 몰라도 부자들을 시기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왜 못사는 사람들이 기득권층을 위해 그처럼 열심히 발 벗고 나서는지에 대한 통찰력이 엿보인다.
여론이 들끓고 검찰수사가 시작되자 두더지처럼 자취를 감췄던 어버이연합이 이번 달 말 새로 사무실을 열고 거리시위를 재개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어버이연합의 끈질긴 생명력은 기득권 유지의 교묘한 메커니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한국사회의 서글픈 풍경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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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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