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들이 ‘에일리언(Alien)’이라는 말을 들으면 십중팔구는 같은 제목의 공상과학 공포영화를 떠올릴 터이다. 거의 40년 전 시고니 위버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이다. 상용 우주선에 다른 혹성의 괴물이 침투해 승무원들을 차례차례 죽인다. 아카데미상을 여러 개 받은 이 영화의 속편이 지금까지 다섯 개나 만들어졌고 내년 8월에 또 한 개가 개봉될 예정이란다.
하지만 이민자인 우리 귀엔 에일리언이 ‘불법체류자’로 들린다. 언론과 정부 당국자들이 불법체류자를 ‘illegal aliens’로 칭한다(물론 ‘illegal immigrants’라고도 한다). 영화 속 괴물만큼이나 혐오스러운 모양이다. 이민 반대자인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후보는 자기가 당선될 경우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고 국내 ‘illegal aliens’를 모두 추방시키겠다고 떠벌인다.
그런데 문제의 그 용어를 폐기시킬지 여부를 놓고 요즘 연방의회가 시끄럽다. 명문 사립대학인 다트머스 칼리지 학생들의 진정서가 발단이 됐다.
지난 2014년 불체자 출신인 멜리사 패디야가 학교도서관에서 이민관련 논문자료를 찾다가 카탈로그에 ‘illegal aliens’ 라는 표제 꼭지가 너무 많이 눈에 띄자 담당사서인 질 배론과 의기투합해 이를 시정키로 했다.
이들이 조직한 학생단체 ‘이민개혁 평등 기원자들(CoFIRED)’은 지난 2년간 연방의회 도서관에 ‘illegal aliens’라는 경멸적 라벨을 없애달라고 끈질기게 진정해왔다. 의회도서관은 드디어 지난 3월 이를 ‘비 시민(noncitizens)’이나 ‘비공인 이민(unauthorized immigration)’으로 바꾸기로 결정, 미국은 물론 전 세계 공공 도서관들이 이를 따르도록 길을 터놨다.
하지만 트럼프의 막말 영향인지 이민문제가 올해 대선에서 유난히 뜨거운 감자로 대두된 가운데 일부 공화당 보수파들이 “학생들의 압력에 굴복한” 의회 도서관을 비난하고 나섰다. 공화당이 주도하는 하원은 ‘aliens’는 물론 연방법에 기재돼 있는 모든 용어를 의회 도서관이 변경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까지 마련해 내달 열리는 정기 회기에서 다루기로 했다.
이 법안을 상정한 다이앤 블랙(공·테네시) 하원의원은 미국에 불법적으로 들어온 이민자를 불법 외국인으로 부르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며 “일부 좌파 특수 이해집단의 엉뚱한 압력에 연방의회가 굴복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녀 법안의 동조자들 가운데는 올해 공화당 대선후보 지명전에서 트럼프에 패퇴한 테드 크루즈(공·텍사스) 상원의원도 포함돼 있다.
멕시코계인 조애킨 카스트로(민·텍사스) 하원의원은 “불법이민은 있을지 몰라도 불법인간은 없다”며 히스패닉, 흑인 및 아-태 의원간부회와 합동으로 이 법안에 항의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6월 “원주민(인디언)이 아닌 미국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불법 이민자 조상의 후예일 것”이라며 트럼프의 반이민, 고립주의 공약을 비아냥했다.
의회 도서관 측도 물러서지 않았다. 해마다 카탈로그의 라벨을 현실에 맞게 바꾸지만 그동안 의회가 개입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며 1975년 ‘니그로(negro)’ 2007년 ‘미친 자(insane)’ 라벨을 자체적으로 없앴다고 지적했다. 더군다나 AP통신을 비롯한 세계 주요 언론들과 학술협회지들이 ‘illegal aliens’를 공식용어로 쓰지 않는 추세라고 도서관은 덧붙였다.
동양인을 폄훼하는 ‘오리엔탈(oriental)’도 ‘아시안’으로 바뀌었다. 지난 2002년 신호범 전 워싱턴 주 상원의원이 전국 최초로 ‘오리엔탈 용어 사용금지 법안’을 상정해 통과시켰다. 연방의회에서도 14년 뒤인 지난 2월 그레이스 맹(민·뉴욕) 하원의원이 상정한 비슷한 법안이 하원을 통과한데 이어 지난 5월 상원도 통과해 오바마 대통령의 서명만 남겨두고 있다.
물론 이 법은 공문서에만 적용된다. 알고 쓰든, 모르고 쓰든, 이미 오리엔탈이라는 단어를 상호로 쓰고 있는 식품점이나 한의원들은 겁낼 필요가 없다. 하지만 오리엔탈은 옥시덴탈(서양인)을 기준으로 차별화된 용어이다. 우리가 굳이 스스로 쓸 말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큰 소리 못 친다. 내가 다니는 교회 영어이름의 첫 글자가 ‘오리엔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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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시애틀 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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