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청중을 사로잡은 무슬림 아메리칸 변호사 키즈르 칸의 7분 스피치는 미국 내 무슬림계 이민자들이 간절하게 기다려온 강력한 보이스였다. 이슬람 급진집단의 잇단 테러 이후 쏟아지는 비난과 모욕을 속수무책 견디어 온 이들에게, 새 조국을 위해 전사한 아들의 애국심과 미국의 헌법이 보장하는 자신들의 권리를 당당하게 강조하며 반 무슬림 공약을 남발해온 공화당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에게 “당신은 무엇을 희생했는가?” “헌법을 읽어보기는 했는가?”라고 질책한 그는 ‘웅변적 대변인’이었다.
아직도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아내와 함께 연단에 올라 전사자와 유가족의 고통스런 희생을 자유수호의 보람으로 승화시키는 그의 연설에 눈물 흘리는 무슬림들을 보며 문득 4.29 폭동 후 TV 시사프로에 출연해 폭동의 최대 피해자이면서 원인제공자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고서도 힘이 없어 침묵하던 한인상인들을 대변하며 미디어와 주류사회의 사태왜곡에 강력히 항의하던 앤젤라 오 변호사의 웅변에 눈물 흘리던 우리가 생각났다.
칸은 트럼프 비난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라크 전장에서 자살폭탄 차량으로부터 자신의 부대원들을 보호하다 숨진 아들 후마윤 칸 대위의 희생을 기려달라고 청하면서 투표 참여를 촉구했다. “모든 애국적 미국인과 모든 무슬림계 이민자와 모든 이민자 여러분, 금년 선거를 절대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역사적 선거입니다. 반드시 투표해주시기 바랍니다”
4.29를 통해 한인사회가 정치력의 중요성을 절감했듯이 무슬림사회도 트럼프의 반 무슬림 광풍을 통해 정치력 없이는 제몫의 권리를 누리기 힘든 다민족사회의 생존법칙을 깨달았을 것이다. 실제로 무슬림계의 100만 명 유권자 등록 캠페인은 요즘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2012년 50만 명이었던 무슬림 등록 유권자가 이미 82만4,000명을 넘어섰다. 칸의 스피치 직후 등록이 급증했다.
무슬림 이민사의 한 페이지, 2016년 대선의 감동적 한 순간만으로 기억되었을 칸의 스피치가 지난 한 주 동안 전국적 논쟁의 핵으로 비화된 것은 트럼프의 자충수, 그 특유의 부적절하고 비정상적인 대응 때문이었다. 하긴 자신에 대한 비판을 성숙하게 참아낸다면 그건 트럼프 스타일이 아니긴 하다.
평소 “당한 것은 몇 배 강하게 갚아준다”는 보복 소신을 자랑하며 좋은 쪽이건 나쁜 쪽이건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번엔 너무 나갔다. “이것이 미국 대선후보의 말인가”를 넘어 “트럼프는 정말 대통령이 되기 원하긴 하는가”라는 의구심마저 갖게 했다.
명색이 대선후보인데 칸을 공격하기에 급급해 전사자 유가족의 아픔을 공감하기는커녕 비하 발언으로 치달은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겐 아들 잃은 슬픔에 건드리면 울음을 터트릴 것 같던 모습으로 서있던 칸 대위의 어머니에 대해 “그녀가 연단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여성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이슬람 전통으로) 발언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는가 하면 자신도 사업을 키우느라 전사자와 유가족의 고통과 같은 ‘희생’을 치렀다고 주장했다.
트럼프의 대통령 자질부족은 오랫동안 지적되어왔으나 이젠 전사자의 부모까지 비하했으니 군 통수권자의 자격도 없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대선출마 연설에서 멕시칸 이민을 강간범으로 집단 모욕하며 시작된 그의 막말 기행도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종차별과 성차별, 장애인 비하까지도 기성정치와 특권층에 대한 아웃사이더의 용감한 도전이라고 환호하는 표밭에 밀려 힘을 못 쓰던 트럼프에 대한 비판과 반대가 이번엔 혐오와 절망으로 고조되고 있다.
초당적인 비판이 쏟아지면서 트럼프를 흔들어대는 역풍은 아직 진정될 기미가 아니다. 일부 공화당 인사들은 트럼프 지지 거부, 탈당, 힐러리 지지 선언 등으로 이탈을 감행했다. 그러나 당 지도부는 트럼프 비판에 까지는 나섰으나 지지철회는 못하고 패닉 상황에 빠진 채 트럼프가 낙마할 경우 대책을 모색 중이라는 소문까지 뒤숭숭하다.
정작 트럼프 장본인은 강경하다. 칸 부부와의 충돌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고개를 세웠고, 본선이 100일도 채 안남은 시점에 사분오열 조각난 공화당의 상태를 뻔히 보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단합되어 있다”고 큰 소리를 치며 친 러시아 발언에서 신중치 못한 여성의 성희롱 대처 발언까지 막말 퍼레이드를 계속하고 있다.
급기야 트럼프의 계속되는 자충수는 캠페인 전략이 아닌 정신적 결함이라는 주장마저 제기되었다. “자기 파괴적이며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성격장애 증상을 보인다” “정말 미친 것인가” “그는 자신이 침몰하지 않고 어디까지 비정상적 캠페인을 할 수 있는지 한계 테스트를 하고 있는 것일까”…트럼프 ‘문제’는 언쟁의 수준을 넘어서 국가의 위협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일주일째 계속되는 회오리 속에서 트럼프 캠페인이 휘청대고 있다. 지난주 초 비슷하게 올라갔던 힐러리와의 대선 승률도 다시 82% 대 18%로 곤두박질 쳤다. 그러나 그동안 다른 후보였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논란 속에서도 되살아난 탄력을 과시한 사람이 트럼프다. 공화당 후보로는 드물게 소액 기부도 급증했다. 그래서인가. “이것이 트럼프 추락의 시작일까?”라는 물음에 아무도 선뜻 대답을 못한다.
‘위기의 트럼프’가 ‘위기의 아메리카’로 바뀌지 않으려면 얼마나 더 강도 높은 막말이 필요한 것일까.
<
박 록 주필>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