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전당대회 둘째 날 밤 11시가 넘은 파장 무렵, 무대 위 대형 스크린에 초대 조지 워싱턴부터 미 역대 대통령들의 사진이 하나씩 비쳐지기 시작했다.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에 이어 현직 버락 오바마의 사진이 지나간 후 스크린엔 유리천장이 산산조각으로 깨지면서 힐러리 클린턴의 활짝 웃는 모습이 등장했다. 대회장은 다시 뜨거운 환호와 박수갈채로 넘쳐났다.
‘대통령 힐러리’를 위한 민주당의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었다. 26일 힐러리를 미 사상 첫 여성 주요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새 역사를 기록한 민주당은 이제 가장 높은 유리천장을 깨고 ‘첫 여성 대통령’이라는 더 큰 역사를 쓰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가고 있다.
결과에 따라 미국의 핵심가치가 변질될 수도 있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할 전투를 향해 단합된 출정식이었어야 할 금년 전당대회의 첫날은 혼란스러웠다.
경선의 강력한 라이벌 버니 샌더스 지지자들의 거센 반발 시위, 민주당 전국위원장의 편파적 선거관리 내용의 이메일 폭로와 이에 따른 해임 등 악재가 겹치면서 분열과 혼란 속에 불안했던 출발은 첫날 밤 샌더스의 “힐러리가 반드시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웅변적 지지선언으로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매일 이어지는 뛰어난 연사들의 감동적인 스피치가 대회장을 압도하고, 눈앞에 다가 온 ‘첫 여성 대통령’에 환호하는 102세 은퇴 여교사가 흘린 감동의 눈물과, 좌절된 ‘버니의 꿈’에 실망한 20대 대학생이 삼키려 애쓰는 울분의 눈물이 함성과 박수 속에 함께 녹아들면서 축제분위기로 돌아온 전당대회는 이제 하루만을 남겨놓고 있다.
이번 전당대회의 최대 목표는 미국의 유권자들에게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을 다시 소개하는 일이며 ‘신뢰 회복’이라는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다. 퍼스트레이디로, 연방 상원의원으로, 국무장관으로 지난 25년간 미 정치무대 한 복판에서 조명을 받아온 힐러리를 모르는 사람도, 힐러리에 대한 의견을 갖지 않은 사람도 거의 없어 더욱 그렇다.
너무 오랜 세월 정치 일선에 머물며 끊임없는 공격과 검증과 분석과 패러디의 대상이 되어온 그에 대한 사람들의 호·불호의 감정은 상당히 선명하다. 유능하고 경험 풍부하지만 늘 경직된 방어태세에 친근감 느끼기 힘든 엘리트 정치인의 인상을 떨쳐버리지 못했는데 출마 후엔 이메일 스캔들과 고액 강연료 등이 불거지면서 신뢰도와 호감도가 함께 곤두박질치고 있다.
“당신을 믿어도 됩니까”라고 회의적 시선을 던지는 유권자들에게 그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진실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면서 ‘익사이팅한 후보’로 부각시키는 난제를 안고 힐러리 띄우기에 집중한 첫 사흘은 성공적이었다.
“난 1971년 봄에 한 소녀를 만났습니다”로 시작된 남편 빌 클린턴 대통령의 긴 ‘러브스토리’ 스피치에 담긴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인간적 면모와 성실하고 능력 있는 정치가로서의 대선후보 자격은 청중들의 감동을 이끌어냈고, 인기 높은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가 “힐러리 덕분에 나의 딸들과 이 나라 모든 아들들과 딸들이 여성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다…11월의 투표는 누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좌우하는 권력을 갖게 될지 결정하는 일이다…나의 친구 힐러리만이 그런 책임을 맡길 수 있는, 진정으로 미국의 대통령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라고 강조한 최고의 찬사는 분위기를 고조시키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도널드 트럼프를 맹공격하며 “지구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강인한…우리 모두를 위해 싸우는 여성 힐러리 클린턴이 우리의 선택”이라고 외친 리버럴의 기수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의 선언에서 서류미비 이민자녀인 드리머, 9.11 테러의 부상자, 경찰의 총격에 자식을 잃은 흑인 어머니들, 수많은 정치가와 스타들이 차례로 나와 자신이 체험한 힐러리의 따뜻한 도움과 불굴의 용기에 대한 찬사에 이르기까지 사흘간 계속된 조연들의 역할은 어젯밤 “미 역사상 힐러리 클린턴보다 더 대통령될 자격과 준비를 갖춘 후보는 없었다”는 현직 대통령의 스피치로 모두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힐러리 자신의 몫이다. 오늘밤 수락 연설을 자신의 참 모습을 보여주면서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가장 중요한 과제를 삼을 것인지 국정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트럼프를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최선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다양성과 포용성을 기반으로 “함께 하면 강해지는…힐러리의 미국”이 반이민 고립주의로 치달으며 “다시 위대하게”를 부르짖는 “트럼프의 미국”과 어떻게 다를 것인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 회복을 위한 진정성 담긴 노력이다. 선천적인 정치가도, 유창한 웅변가도 아닌 그에겐 자신의 약점을 소탈하게 인정하고 강점을 부각시키는 것이 유권자의 마음을 얻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위험한 후보’ 트럼프에 대해 공화당 유권자들 뿐 아니라 무소속과 민주당 내 샌더스 지지자들에게도 “오 마이 갓,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수도 있구나”란 경종을 계속 울려주는 것도 후보 힐러리가 명심해야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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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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