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공화당’의 출범식이라 할 수 있는 2016년 공화당 전당대회는 여러모로 트럼프스럽다. 원색적인 막말로 표밭의 분노를 자극해 승리를 거둔 그의 공화당은 가히 ‘분노의 정당’임을 전국의 유권자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녀를 투옥하라(Lock her up)” - 민주당의 사실상 대선후보 힐러리 클린턴을 감옥에 가두라고 피켓을 흔들며 목청껏 외쳐대는 광경은 언뜻 전쟁영화에선 본 인민재판을 연상케 해 불편하고 섬뜩했다. 대회 둘째 날 기조연설자인 검사 출신의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가 힐러리의 경력과 인품에 대한 ‘모의재판’을 주재하듯 맹공격을 퍼부은 후 조목조목 “유죄냐? 무죄냐?”고 묻자 흥분한 청중들이 구호를 외치듯 연달아 ‘화답’한 것이다.
이날 하루 19명 연사 중 13명이 ‘힐러리 타도’ 연설에 집중한 “이례적으로 네거티브한 대회”라고 애틀랜틱은 전한다. 국무장관 재임시의 이메일 스캔들과 리비아 벵가지 테러사태에 대한 책임추궁을 넘어 이번엔 힐러리를 악마숭배자인 듯 매도하는 어불성설의 주장까지 나오며 트럼프 공화당의 면면이 다채롭게 드러났다.
전국에 TV로 비쳐지는 전당대회는 미국인들이 본격적으로 대선에 관심을 갖는 계기라 할 수 있다. 축제분위기 속에서 단합하여 선출된 당의 새로운 리더를 전국에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자리다. 과거 11월 본선에서 승리한 각 당의 전당대회들은 특히 더 밝고 낙관적이었다. 로널드 레이건이 희망찬 ‘미국의 아침’을 약속한 1980년 공화 전당대회가 그랬고 빌 클린턴과 앨 고어, 두 40대 기수가 ‘젊은 미래’를 외친 1992년 민주당 전당대회의 효과는 클린턴의 지지율 15% 포인트 상승으로 즉각 나타났다.
트럼프에게 이번 전당대회는 그가 경선에서 무기 삼은 분노와 공포 외에 무엇으로 어필할 수 있는가를 전국의 유권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무대로, 심각하게 분열된 공화당을 단합시키며 리더의 역량을 평가받을 시험대로 기대되어왔다. 표밭과 당내에 ‘대통령다운’ 트럼프의 새 모습을 소개할 기회였다.
그러나 아직 난무하는 비난과 공격 속에 불안과 공포의 조성이 수위를 높여갈 뿐 내일의 희망은커녕 부동층 유권자에 어필할 트럼프의 새로운 감동도, 그가 겁주는 온갖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당의 단합을 위한 화해의 손길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힐러리 타도’를 당의 단합 요인으로 꼽는다면 모를까.
보다 근본적 문제에 직면한 것은 트럼프 점령이후 사분오열된 공화당일 것이다. 일부는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일부는 마지못해 악수하고, 일부는 경멸하며 외면하고, 또 일부는 최후까지 항전하며…이들이 아직 해답을 찾지 못한 질문은 “트럼프는 일시적 현상인가, 아니면 공화당의 영구적인 변화를 의미 하는가”라고 월스트릿 저널은 지적한다.
분노한 민심과 서로를 헐뜯는 주류후보들이 공멸해버린 이상한 경선의 와중에서 어부지리로 지명된 일탈현상이라면 트럼프는 전통적 공화당 조직을 잠시 빌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공화당의 정체성이 변하고 있는 시기에 트럼프가 등장하여 그 변화를 끌어가는 당의 새얼굴이 되었다는 트럼프 진영의 주장이 맞는다면 이제 공화당은 정통 보수정당이 아닌 포퓰리스트 정당이 되는 것이다. 월스트릿 저널은 그 정확한 해답은 본선의 결과가 나오면서 밝혀지기 시작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노골적인 반이민 아웃사이더 트럼프와 강경보수 티파티 마이크 펜스를 대권티켓으로 지명한 지금의 공화당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스트 정당의 면모가 역연하다. 그런데 그 대중이 모든 국민이 아니다. 트럼프의 대중은 백인 중심이다. 그의 캠페인 전략은 백인표밭에 올인 베팅이 분명해 보인다.
기성정치에 대한 염증과 힐러리의 비호감도를 감안한다면 트럼프의 대선 승률을 절대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백인표밭 확대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미트 롬니는 백인표의 59%를 얻고도 패했다. 최근의 선거에서 백인표 최고 득표율은 1984년 레이건의 66%였다. 히스패닉을 비롯한 소수계의 표밭이 지금보다 적을 때였다.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도 본선에서 승리하려면 오바마 당선을 도왔던 스윙보터를 잡아야 한다. 그것이 매년 빠른 인구 변화에 따라 표밭도 함께 달라지는 미국의 현실이다. 그러나 2012년 공화당의 대선 패인 분석보고서가 촉구한 소수표밭 포용하는 ‘빅 텐트’ 정당을 트럼프는 정면으로 거부해 왔다.
오늘 트럼프의 후보지명 수락연설은 공화당의 백악관 탈환을 위한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계속 반쪽 공화당의 추종자들만을 향해 반이민 공약을 재확인 할 것인지, 당의 단합을 강조하며 마이너리티를 향해 빅 텐트 정당 지향을 약속할 것인지, 자신이 경고한 미국의 난제에 대한 건설적 해결책을 제시하며 ‘트럼프 대통령’을 상상 가능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역시 트럼프는 트럼프”임을 과시해 민주당을 안심시킬 것인지…
오늘 연설을 지켜보면서 공화당 유권자들의 깊은 성찰도 시작될 것으로 믿는다 - 나라를 위해, ‘링컨의 정당’을 위해 트럼프의 패배를 더 두려워해야하나, 트럼프의 승리를 더 두려워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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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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