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명의 무고한 인명을 앗아간 미 최악의 총기난사사건이 발생한지 열흘도 채 안된 지난 20일 연방상원은 15시간의 필리버스터 끝에 어렵게 표결에 부쳐진 4개의 총기규제 법안을 하나하나 모조리 죽여 버렸다.
월요일 저녁으로는 드물게 꽉 들어찬 방청석에선 지나간 총기참극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3년여전 샌디훅 초등학교 참사에서 교장이었던 어머니를 잃은 에리카는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지난해 12월 샌버나디노 총기테러에서 아버지를 잃은 티나, 버지니아텍에서 맞은 3발의 총탄이 아직도 몸속에 들어있는 콜린, 2011년 투산 총기난사 현장에서 범인의 탄약클립을 움켜잡으며 몸싸움을 벌였던 패트리샤…굳은 표정의 이들은 분노하고 실망했지만 모두 “놀랍지는 않다”라고 말했다.
총기난사가 발생할 때마다 느끼는 그 기시감, ‘데자뷰’에 익숙해진 것이다 : 정치지도자들은 애도를 표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천명한다. 그러나 백악관과 의회가 총기규제를 촉구하고 민주당과 공화당이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 시작하면, 어떤 규제도 ‘위헌’이라고 반대하는 전국총기협회(NRA)가 수백만 회원과 엄청난 재력을 앞세운 파워를 행사하며 논쟁의 방향을 주도한다.
매번 먼 길을 달려와 연방의원들을 만나고 기자회견에 참석하며 총기규제를 간절히 호소해온 유가족들은 이번에도 또 총기협회의 위협에 굴복한 채 총기규제를 외면한 의원들을 씁쓸히 바라보아야 했다.
민주당이 추진하는 총기규제법은 상식적인,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이다. 2008년 연방대법원 판결이 보장해준 수정헌법 제2조의 ‘개인의 총기소지 권리’에 대한 침해와는 거리가 멀다.
비행금지자, 테러의심자, 정신질환자 등 위험한 사람들에 대해 총기판매를 금지하고, 위험인물 여부를 알아내기 위해 총기구입자의 신원조회를 확대하며, 대량살상이 가능한 군사용 무기는 민간인에게 팔지 못하도록 한다 - 어떻게 이 상식적인 규제가 ‘위헌’이 될 수 있는가.
지난주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서 발생한 총기테러 이후 총기규제 강화 여론이 높아지자 공화당도 관계법안을 상정하기는 했다. 그러나 위험인물에 총기판매 거부를 극히 힘들게 하는, 총기협회조차 지지할 정도의 물 타기 법안이어서 민주당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공화당 법안은 총기폭력을 막는데 아무런 소용이 안 된다고 지적한 해리 리드 민주당 상원대표는 “자, 봐라, 우리도 노력했다”라는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하다고 공격했다.
연방하원의원이 공식행사에서 총을 맞고 쓰러졌어도, 20명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교실에서 떼죽음을 당했어도, 직장의 송년파티에서 ‘외로운 늑대’ 테러범이 14명 동료를 쏘아 죽였어도 총기규제를 반대해 온 것이 총기협회에 무릎 꿇은 공화당이다.
총기규제가 다시 무산된 후 플로리다 주 빌 넬슨 민주당 상원의원은 “슬픔에 잠긴 유가족들에게 뭐라고 할 것인가…NRA가 다시 승리했다고 말해야 하는가”라고 개탄했다.
공화당의 어느 의원도 잠재적 테러리스트가 합법적으로 군사용 대량살상무기를 살 수 있어야 한다고 믿을 리는 없다. 선거를 앞두고 상대에 입법승리를 안겨줄까 우려하는 워싱턴의 양극화 대립과 총기로비의 막강한 영향력이 앞으로의 참사를 막을 수도 있을 총기규제 합의를 무산시킨 것이다.
다행히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또 하나의 총기규제 법안이 마련되었다. 이번엔 초당적 법안이다. 중도파 공화당 수전 콜린스를 비롯해 공화·민주·무소속 의원들이 공동 작성했다. 비행금지 명단이나 공항에서 2차 검색을 해야 하는 선별검색 대상자 명단에 오른 사람들에 대한 총기판매 금지 권한을 연방법무장관에게 부여하는 한편 금지 대상자는 연방판사에게 이의를 신청할 수 있고 승소할 경우 변호비용을 정부가 부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콜린스법안은 점점 더 잦아지고 갈수록 악화되는 미국의 총기폭력 현상에 대처하기엔 너무 미흡한 내용이다. 그래도 통과된다면 확실한 ‘진전’의 계기다. 언젠가는 다른 선진국들처럼 효과적인 총기규제를 입법화시킬 긴 여정을 향해 내딛는 첫 걸음이 될 수 있다.
미치 매코넬 공화당 상원대표가 노력하겠다고 했으니 이번 주나 내주에 표결에 회부될 수 있을 것이다. 통과는 ‘실낱같은 희망’에 달려 있다. 민주당 의원들이 다 찬성한다 해도 공화당 16표를 더 확보해야 통과에 필요한 60표 문턱을 넘을 수 있어서다. 어제 리드 대표가 지지를 밝혔으니 민주당은 걱정 안 해도 되겠지만 NRA가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선 이상 공화당의 지지 확보는 안심하기 힘들다.
공화당도 이번엔 “위험인물의 무장할 수 있는 권리”보다는 “그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무고한 사람들의 권리”를 더 존중해 줄 수 있을까. 총기협회에 겁먹는 대신 절대다수가 총기규제 강화를 원하는 국민의 의견에 따르는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그래서 그 음산한 데자뷰의 재연을 막아줄 수 있을까.
이번에도 또 외면한다면 방법은 한 가지다. 총기로비에 무릎 꿇은 겁쟁이들을 엄중하게 벌하는 표밭의 심판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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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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