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무 살 이후 시련은 내가 자초했지만, 나를 철 들게 했다”
▶ “열심히 벌어 딸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고 싶다”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살지 않겠다. 그때는 골프가 재미없고 지루했다.”
무려 12년 만에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은 안시현(32·골든블루)은 화장기 없는 민얼굴에 수수한 차림새로 기자를 만나러 왔다.
13년 전인 2003년 열아홉 살 안시현은 ‘얼짱 골퍼’의 원조였다. 얼굴이 예쁘고 깜찍했고 큰 키에 팔다리는 늘씬했다. 예쁜 골프 선수도 더러 있었고 실력이 뛰어난 골프 선수도 적지 않았지만 둘 다 갖춘 선수는 사실상 안시현이 처음이었다.
13년 전 안시현은 ‘완판녀’였다. 안시현이 입은 골프웨어와 골프 모자는 전국 매장에서 순식간에 팔려나갔다.
2003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CJ 나인브릿지 클래식은 안시현을 국내 1호 ‘얼짱 골퍼’와 ‘완판녀’로 만든 무대였다. 이듬해 LPGA투어에서 진출해 신인왕까지 차지하면서 안시현은 인생 최고의 시기를 만끽했다.
하지만 내리막길은 너무나 빨리 찾아왔다. 2011년 LPGA투어를 접을 때까지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노는 데 정신이 팔려 훈련을 뒷전이라고들 수군댔다.
유명 연예인과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에 이어 딸을 낳았다. 결혼은 2년 만에 파경을 맞았다. 2014년부터 골프채를 다시 잡았지만 2년 동안 그저 그런 성적에 그쳤다. 골프에 회의가 들어 그만둘까 생각한 지 3주 만에 한국 최고 권위의 메이저대회 한국여자오픈 정상에 올랐다.
안시현은 “먼 길을 돌아왔다”고 표현했다. 그는 “스무 살 이후 시련은 모두 내가 자초한 것”이라면서 “시련이 나를 철 들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생계형 프로 골프 선수라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하나뿐인 보물’이라는 다섯 살 딸 그레이스를 제대로 키우는 데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골프를 친다고 말했다.
나이는 들었지만, 샷은 후배들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했다. 강한 체력을 타고나지 못해 이를 악물고 체력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안시현은 “어릴 때보다 오히려 요즘 더 열심히 한다”고 밝혔다.
다음은 안시현과 일문일답.
-- 모처럼 바빴겠다.
▲ 갑자기 바빠졌다. 축하 전화와 축하 문자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집으로 꽃도 많이 왔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정말 많이 왔다. 그동안 응원해주시고 도와주신 분들이 다들 연락해왔다. 잊지 않고 축하해주신 팬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 요즘도 예쁘다는 팬들이 많다고 하더라.
▲ 예쁘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관리를 좀 해야 하나? 하하.
-- 13년 전, 12년 전에는 최고의 스타였다. 그때 안시현과 지금의 안시현은 어떻게 다른가.
▲ 많이 달라졌다. 그땐 사회를 몰랐고 제멋대로였다. 지금은 자제할 줄 알고 사회를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사회도 좀 안다. 엄마 말로는 사람 됐다고 하더라.
-- 지난 세월이 후회되나.
▲ 많이 후회된다. 내가 그때 좋은 상황이었고 좋은 여건 아니었나.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열심히 안 했다. 왜 그랬을까, 왜 열심히 안 했을까 후회된다. 다시 되돌아간다면 그러지 않아야지 하는 생각 많이 한다. 그땐 솔직히 골프가 재미없고 지루했다. 부모님 속도 많이 썩였다.
-- 주니어 때도 힘든 시기가 있지 않았나.
▲ 돌아보면 주니어 땐 누구나 다 겪는 성장통이었다. 어릴 땐 다른 친구들과 다른 생활이 싫었다. 학교도 못 가고 미팅도 한 번 못 했다. 남들 다 하는 거 나는 왜 못하고 살까, 왜 내가 다른 사람 욕심을 위해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이런저런 힘든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는 어려움이지만 스무 살 이후엔 내가 만든 어려움이라는 게 차이다. 성인이 된 다음에 맞은 시련은 다 내 책임이다. 그래서 어릴 때 겪은 어려움보다 성인이 된 뒤 시련에서 더 많이 배웠다.
-- 어린 나이에 너무 빨리 성공한 게 오히려 독이 됐다고 보나? 더 천천히 컸다면 더 나았다는 생각을 하나?
▲ 어린 나이에 찬스를 잘 잡았는데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 잘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 더 나은 삶은 살았을 것 같다. 그런 가르침이 없어서 이렇게 멀리 돌아온 것 같다.
-- 2003년에 기자회견에서 '차를 시속 200㎞로 몰면서 스트레스를 날린다'거나 '골프 선수가 되지 않았으면 탤런트가 됐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 다 철이 없어서 한 말이다. 지금은 아이 엄마니까 물론 철저하게 안전운행이다. 탤런트도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더라.
-- ‘싱글맘’이다.
▲ 딸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고 싶다. 그러려면 경제적 뒷받침 되어야 하니까 열심히 벌려고 한다. 사실 엄마 역할과 프로 선수를 겸하는 게 힘들다. 딸과 같이 있고 싶지만 돈을 벌어야 딸을 키울 수 있으니까. 직장 다니는 다른 엄마들이랑 다를 바 없다.
-- 가장 힘든 게 뭔가.
▲ 딸을 떼놓고 나가는 게 힘들다. 어떤 때는 다리를 붙들고 가지 말라고 한다. 연습 라운드 가려는데 그러면 정말 마음이 아프다.
-- 그럴 땐 어떻게 하나.
▲ 달랠 수밖에 없다. 엄마가 굿샷 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그레이스 하고 싶은 그림도 마음껏 그리고 노래도 마음껏 부를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 알아듣고 다녀오라고 한다. 대견하고, 고맙고, 미안하다.
-- 어머니가 딸을 보살피고 있는데.
▲ 어머니는 ‘내 평생 아이만 키운다’고 한숨이다. 일곱 살 연하 동생이 있는데 나를 다 키워놓고도 그 동생을 키우셨다. 동생을 다 키웠더니 이번엔 손녀까지…그래도 그레이스 보시면서 우울증도 없어지고 좋은 점도 있다고 하신다. 세상에서 제일 고마운 어머니다.
-- 우승 인터뷰 때 3주 전에 골프에 회의가 들어 그만두려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무슨 일이 있었나.
▲ E1 채리티오픈 마지막 날 말도 안 되는 실수가 막 나왔다. 이게 한계인가? 나름 지난겨울 준비한다고 했는데 이게 뭔가? 샷 감각도 나쁘지 않고 퍼팅도 괜찮았는데 인제 그만둬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골프 관두고 무얼 할까 고민도 했다. 딸한테 ‘엄마 골프 관둘까?’ 했더니 ‘응 그래’ 하더라. 그래서 정말 그만둬야 하나, 지금 딸한테 내가 필요한 시점인가 하는 마음도 들었다.
-- 그런데 어떻게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나.
▲ 하필이면 그때 어머니가 유치원 수업료 고지서 등등을 내놓더라. 그걸 보니까 ‘어휴 내가 열심히 하자. 내가 골프 그만두면 이걸 어찌 감당하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 다시 마음을 추슬렀다.
-- 결혼, 출산으로 쉬다가 투어에 복귀할 때 어떤 마음이었나?
▲ 사실 시드전 볼 때 걱정 많았다. 망신당하면 어쩌나 하고. 죽기 살기로 하자고 마음먹었고 다행히 시드를 땄다. 복귀한 다음에 첫 대회를 나갔는데 정말 떨리고 설레더라. 처음 투어에 올라왔을 때와 처음 미국에 갔을 때와 비슷했다.
-- 2년 동안 성적이 별로였다.
▲ 샷도 좋고 자신도 있었는데 몸이 안 따라주더라. 우승은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작년에는 샷이 좋아서 부쩍 욕심을 냈다. 그런데 욕심을 낼수록 뭐가 잘 안 맞았다.
-- 지난 겨울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했다고 했는데.
▲ 겨울에 태국으로 3주 동안 전지훈련을 다녀왔다. 짧게 가는 만큼 집중적으로 훈련했다.
-- 훈련은 많이 하나?
▲ 어릴 땐 2003년 CJ 나인브릿지 클래식 우승 이후 잘 치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으로 훈련도 별로 안 했다. 지금이 오히려 더 열심인 것 같다.
-- 복귀해서 몸이 안 따라주더라고 했는데 체력은 어떤가.
▲ 원래 체력이 강한 편이 아니라서 훈련 꾸준히 열심히 해야 한다. 그래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꾸준히 틈날 때마다 한다. 안 하면 금방 체력이 떨어지는 걸 느끼니 안 할 수 없다.
-- 솔직하게 자신의 실력을 평가한다면?
▲ 후배들과 비교해 기술적으로는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그런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투어 선수로 뛰겠나.
-- 선수로서 목표는 무엇인가.
▲ 뭐 하나 딱 정해놓고 그걸 추구한다고 해서 그게 이뤄지는 게 아니더라. 주어진 상황, 주어진 환경에서 하루하루, 매 경기 최선을 다하고 사는 게 내 방식이다. 뭘 정해놓고 아등바등 쫓는 게 너무 힘들더라. 그걸 이루지 못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되지 않나. 골프가 내 일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 그렇다면 인생의 목표는 뭔가.
▲ 다시 뒤돌아봤을 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 10년 전을 돌아보면 참 후회되는 게 많다. 앞으로는 후회하고 싶지 않다.
-- 딸이 커서 어떤 사람이 됐으면 좋겠나?
▲ 건강했으면 하는 바람이 첫 번째다. 하고 싶은 일이 나쁜 일 아니면 다 뒷바라지하겠다.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는 아니더라도 자존감 있고 자신감 있고, 남한테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 딸 그레이스는 어떤 존재인가?
▲ 하나뿐인 보물. 뭣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다.
-- 후배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골프 선수로 뛰겠다면 말리겠나?
▲ 선수마다 다르겠지만 나쁘지 않다고 본다. 프로 선수로 활동하는 게 본인이나 아이를 위해서도 좋은 거라고 본다. 자존감도 생기고, 아이도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을까.
-- 원조 얼짱 골퍼로서 외모를 가꾸는데 관심이 많은 후배들을 어떻게 생각하나.
▲ 어떤 게 먼저인지 생각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 일이 뭔지를 알아야 한다. 인정을 받으려면 실력부터 갖추고 나서 외모를 가꿔도 늦지 않을까.
-- 골프 선수는 언제까지 할 생각인가.
▲ 투어 데뷔 동기가 김주미, 임성아다. 국가대표 상비군, 국가대표 시절을 같이 보냈고 미국에서도 같이 뛰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돌아보니 현역 선수는 나 혼자다. 다들 그런다. 내가 제일 오래 칠 줄 몰랐다고…인생이 짧게 가는 게 아닌 것 같다. 당시에는 바로 보지 못하는 빛이지만 오래 하다 보면 빛을 보게 되더라.
언제까지 하겠다고 딱히 정해놓은 건 없다. 정말 못하겠다고 느낄 때까지, 몸이 건강한 한 계속한다는 생각뿐이다.
-- 23일 개막하는 비씨카드·한경 레이디스컵 1, 2라운드에서 박성현, 장하나와 동반 플레이를 치르게 됐다. 둘 다 소문난 장타자들이다.
▲ 제 볼만 쳐야지 괜히 쫓아가려다 다치면 어쩌나. 하하. 장하나와는 한번 쳐 본 것 같은데 박성현은 처음이다. 그런데 골프가 거리로 치는 게 아니지 않나. 한국여자오픈도 아주 긴 코스에서 열렸지만, 코스 매니지먼트를 내가 워낙 잘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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