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CNN에 흥미로운 기사가 올라왔다. “공화당 의원들이 트럼프 관련 질문에 대답하는(혹은 안하는) 5가지 방법”이라는 제목이 달렸다. 전혀 ‘대통령답지 않은’ 언행으로 뉴스를 독차지하는 자당의 사실상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의 그늘에서 대경실색할 그의 주장들에 언급해야하는 연방의원들의 난감한 입장을 전하고 있다.
지난주엔 트럼프의 멕시코계 연방판사에 대한 인종차별적 비판 때문에 곤혹스러웠는데 이번 주 화두는 올랜도 참사다. 49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미 사상 최악의 총기테러 발생 후 자화자찬하는 트윗으로 시작해 무슬림 입국금지와 테러 관련국들로부터의 이민중단 등 극단으로 치닫는 트럼프의 ‘테러대응책’이 뜨거운 감자로 던져졌다.
끈질기게 의견을 물어오는 기자들도, 새로운 리더가 야기하는 논쟁도 피할 길이 마땅치 않은 의원들은 그래서 폴 라이언 하원의장처럼 “대선 후보로 지지는 하지만 의견은 다르다”고 거리를 두거나, “정말 그렇게 말했나? 난 뉴스를 안 봐서 몰랐다”고 오린 해치 상원의원처럼 발뺌하거나, “난 대선이 끝날 때까지 트럼프에 대해 언급 안하겠다”고 존 코닌 하원대표처럼 입을 다물거나, “누가 후보인데?”라며 아직 정식후보가 아니라는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빠져가거나, 셀폰을 귀에 대고 기자 옆을 바삐 지나쳐 의원전용 엘리베이터로 피신하는 묵비권 행사 등 각기 자구책을 강구하고 있다. 하긴 최소한의 양식을 갖춘 공직자라면 트럼프의 올랜도 참사 대응을 공개 지지하기는 힘들 것이다.
경선 내내 표밭의 분노와 불만에 편승해 선동적 언행을 일삼아 온 그는 이번 참사를 계기로 대통령이 되기에는 ‘적절치 않은’ 위험한 성향을 다시 한 번 드러냈다.
일요일 새벽 게이 나이트클럽에서 테러집단 이슬람공화국(IS)과 연계를 주장하는 무슬림 아메리칸에 의해 자행된 총기난사사건 발생 몇 시간 후, 트럼프의 첫 반응이 트위터를 통해 전해졌다 : “내가 급진 이슬람 테러에 대해 옳았다고 축하해준 것에 감사한다, 난 축하는 원치 않는다, 강인함과 경각심을 원한다. 우리는 스마트해져야 한다!” 아직도 사건현장에서 시신 수습이 계속되고 있을 때였다.
그것만으로도 비상식적인 경박한 반응이었는데 인터뷰와 트윗을 통해 계속된 트럼프의 대응은 점입가경이었다. 오바마가 ‘급진적 이슬람’이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지 않는다면 사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대통령과 테러집단 사이에 뭔가 있는 것처럼 음모론을 펴기도 했다.
그리고 월요일, 유세연설을 통해 이른바 자신의 테러대책을 공개했다. 지난해 샌버나디노 총기테러 후에도 주장했던 모든 무슬림의 미 입국금지에 더해 이번엔 미국과 동맹에 대한 테러 사례가 있는 국가들로부터의 이민중단까지 촉구했다.
비실용적인 선동일 뿐 현실적 대안과는 거리가 멀다. 올랜도 테러의 총격범은 미국에서 태어난 아프간계 이민2세다. 이런 ‘외로운 늑대’의 테러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의 부모를 미국엔 받아들인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트럼프는 주장한다. 만인의 평등과 자유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이민의 나라’ 미국의 가치관에 대한 훼손이고 모욕이다.
외국인 무슬림의 입국 금지, 미국 내 회교사원 폐쇄, 무슬림 커뮤니티 감시제도 신설 등 전 세계 10억 무슬림을 ‘미국의 적’으로 암시하는 자신의 정책이 미국의 안보에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해 공화당의 사실상 대선후보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테러전쟁이 국제사회가 단합해 싸워도 쉽게 끝낼 수 없는 긴 싸움이라는 것은 9.11 테러이후 15년을 넘긴 지금 미 국민 모두가 알고 있다. 장기전을 치러가며 이번 같은 비극에 직면한 순간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강하면서도 침착하고 합리적인 리더십이다.
주류 미디어들은 트럼프가 첫 리더십 테스트에서 실격했다고 평가한다. 공포와 분열을 조장하는 ‘대통령 트럼프’의 위기대응 방식이 너무 위험해 보인다는 지적이다.
화요일, 트럼프의 원색적인 비난과 테러대책을 신랄하게 질타한 오바마도 “공포에 쫓겨 행동하고 후회했던 수치스런 역사의 순간들”이 남긴 교훈을 상기시키며 미국의 가치관을 훼손시키는 과잉반응의 부작용을 경고했다. “모든 무슬림을 테러리스트로 색칠하고 한 종교와 전쟁을 벌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테러리스트를 돕는 일”이라고 지적한 대통령은 “이런 사고방식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우리는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2016년 대선의 한 복판에서 터진 올랜도 총기테러는 전례로 보면 민주당에 악재가 될 수 있다. 안보대처엔 공화당을 더 신뢰하는 것이 미 표밭의 전통적 성향이어서다. 금년엔 도를 넘어선 트럼프의 처신 때문인지 좀 다른 모양새다. 트럼프의 지지도가 곤두박질치고 있다. 10명 중 6명이 무슬림 입국금지에 반대하고 트럼프의 비호감도는 70%로 치솟았다.
본선은 이제 막 시작되었고 또 어떤 변수가 대선 판도를 흔들어댈지는 알 수 없다. LA타임스의 도일 맥마너스는 이번 선거의 핫이슈가 ‘테러의 위험성’이 되면 트럼프에 승산이 있고, ‘트럼프 대통령의 위험성’이 이슈가 되면 패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무슬림과 멕시칸 이민 적대를 핵심공약으로 내세우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첫 업무로 수백만 서류미비자 추방을 비롯한 반이민정책 시행을 공언한, 공화당의 사실상 대선후보는 비유럽계 유색인종 이민을 ‘진정한 미국인’으로 생각하기는 하는 것일까.
우리에게 트럼프는 ‘위험한’ 정도를 넘어 ‘치명적’ 후보라는 느낌이 점점 더 강해지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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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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