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한국에서는 세계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갑자기 세상에 눈을 뜨기라도 한 듯 해외여행 붐, 영어교육 광풍, 조기유학 열풍이 몰아치더니 이제는 세계 어디를 가나 한국 노래, 한국 드라마를 즐기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현상과 함께 이제 한국에서는 회사이름, 가수를 비롯한 연예인 이름은 물론이고, 심지어 아파트 이름, 드라마, 영화, 노래 제목에서도, 지방자치단체가 내거는 슬로건에서도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온통 영어가 넘쳐나고 있다.
1950년 6월25일은 한반도에서 또 하나의 전쟁이 시작된 날이다. 나는 이 전쟁이야기를 고조선과 한나라 전쟁, 고구려와 위, 연, 수, 당나라 전쟁, 고구려와 백제 전쟁, 라당 연합군과 백제 전쟁, 황산벌 싸움, 임진왜란 등 역사 속에서 우리 땅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전쟁과 함께 학교에서 처음 들으면서 ‘6.25사변’이라고 배웠다. 그 후 어른들은 이 전쟁을 ‘6.25동란’이라고도 하고 그냥 ‘사변 때’ 또는 ‘난리 때’식으로도 부르는 걸 들으면서 자랐다.
그런데, 근래 들어서 각종 언론매체나 책들에서 이 전쟁을 지칭하는 걸 보면 ‘6.25사변’이나 ‘6.25동란’은 거의 없고, 가끔 ‘6.25전쟁’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이 ‘한국전쟁’으로 부르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 또한 세계화바람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외국에서는 저 전쟁을 ‘Korean War’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국제사회에서 아무도 못 알아듣는 ‘6.25사변(또는 전쟁)’보다는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코리안 워’를 번역한 ‘한국전쟁’이 ‘세계화 시대’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너도 나도 이렇게 부르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코리안 워’는 저 전쟁을 외국인의 입장에서 일컫는 말이지 한국인의 주체적인 입장에서 부르기에 적합한 명칭은 결코 아니다.
6.25사변을 외국에서는 모두 ‘코리안 워’라고 부르는 것도 아니다. 일본은 저 전쟁을 ‘조선전쟁’이라 하고, 중국은 1950년 10월 중공군이 참전하기 전은 ‘조선전쟁’, 그 후는 ‘미국에 대항해서 조선을 도운 전쟁’이란 의미로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라고 부르고, 북한은 ‘조국해방전쟁’이라고 하며 각자 자기들 입장에서 본 주체적인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국제적인 보편성과 객관적인 가치관을 따른답시고 아무 생각 없이 서양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지는 않는다.
역사적 사건의 명칭은 그 사건에 대한 나름의 역사관을 반영한다. 조선과 일본과 중국(명)이 한반도에서 벌인 임진왜란을 저들은 뭐라고 부를까? 침략국인 일본은 이를 ‘분로쿠노에키’라고 한다. ‘분로쿠(文祿)’는 당시 일본의 연호이고 ‘에키(役)’는 전쟁을 뜻하므로 ‘분로쿠시대에 있었던 전쟁’이란 뜻이다. 우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정복 망상에서 비롯된 전쟁이라고 알고 있는 이 전쟁을 일본인들은 고려와 몽고연합군이 일본을 침략한데 대한 복수전으로 정당화하면서 그렇게 부른다.
중국은 이 전쟁을 ‘항왜원조전쟁(抗倭援朝戰爭)’이라 부른다. 그저 조선을 도와서 싸웠을 뿐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데, 6.25참전 때도 꼭 같은 논리와 용어를 쓰고 있다.
러시아는 2차대전을 ‘위대한 애국전쟁’이라고 하고, ‘베트남전쟁’을 당사국인 베트남사람들은 ‘항미전쟁’이라 부른다. 미국인들이 ‘Civil War’라 부르는 노예해방전쟁을 우리는 희한하게도 ‘남북전쟁’이라고 고쳐 부른다. 우리 땅에서 일어난 전쟁은 슬그머니 미국식으로 바꿔 부르면서도 정작 미국 땅에서 있었던 전쟁은 굳이 우리식으로 바꿔 부르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이 시대의 거부할 수 없는 화두처럼 받아들이는 국제화, 세계화가 결코 자신의 정체성마저 팽개친 ‘코스모폴리탄’의 모습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국제적인 교류와 보편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고유 언어를 팽개치고, 그 실체도 애매한 ‘세계인’의 눈으로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데 길들여져 가다보면 조만간 우리는 뿌리를 잃어버린 국제미아의 모습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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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택/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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