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지하주차장에 CCTV가 있어 자동차문을 잠그지 않고 다닌다. 어느 날 아침 주차장에 있는 내 차의 장애물 경고등이 껌벅거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누군가가 밤중에 내 차안에 들어와 장애물 경고등을 켜놓고 간 게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었다. 나중에 잘 살펴보니 차 밑바닥에 유료도로 주행 시 자동 지불 기기가 떨어져 있었다.
자동차 앞 유리 위에 붙어있던 것이 떨어지면서 운전석 앞에 널려 있는 계기판의 장애물 경고등 표시 판를 건드려 경고등이 켜진 해프닝이었다. 이런 경우 뉴턴은 중력을 생각했을 텐 데 나는 누군가를 의심했으니 범부임에는 틀림없다.
의심이란 DNA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유산이다. 야수로 부터의 위험과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는 원시시대에는 살아남기 위해 항상 의심을 품고 경계 태세를 취해야 했다. 농사나 사냥으로 먹을거리를 마련할 줄 알고 난 후에도 누가 자기 것을 뺏어 갈까봐 의심의 눈초리는 계속 지니고 살아야 했다. 의심은 또한 유명한 과학자, 철학자, 의학자, 성직자 등의 탄생에 없어서는 안 될 촉진제도 되였다.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다 보면 좋은 목적의 의심도 변하기 마련이다. 어떤 하찮은 사건이나 상황을 과대평가하여 의심하게 되면 두려움과 불안에 빠지게 된다. 의심할 것을 의심하는 것은 정상이지만 매사를 의심하게 되면 의심이 의심을 낳으면서 자신을 의심의 감옥에 가둬버리게 된다.
의심증은 어느 민족 이민사회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심리적 현상이지만 우리 동포사회에 유달리 많다. 외세에 밀려 언제나 봇짐지고 쫓겨 다녀야만 했던 반만년 역사의 체험은 한국인의 의심 유전인자를 강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남의 나라에서 먹고 살려니 자연히 뇌 속에 잠재된 의심 유전자 활동이 왕성해졌을지도 모른다.
50대 초반의 우아하게 차려입은 여자 분이 남편과 함께 클리닉에 들렀다. 남편의 바람기를 고쳐달라는 주문이었다. 남편은 젊었을 때 꼭 한번 바람을 피운 적은 있지만 그 뒤로는 성실한 남편과 가장으로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 했다. 그런데 자식들이 성장해 모두 집을 떠난 작년부터 아내가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무슨 증거라도 있느냐고 부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남편의 말투와 눈빛만 보아도 틀림없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남편의 바람기에 대한 고착된 의심을 제외하곤 부인의 태도와 언행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어떤 환각이나 이상한 몸짓, 이상한 말투 등 다른 정신적 증상들은 보이지 않았다. 심한 우울증세도 없고, 술이나 어떤 물질에 몰두하지도 않았다. 남편 말로는 부인이 좀 괴팍한 성격이어서 친한 친구가 별로 없다고 했다.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 주위환경(사람 포함)과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반응하는 각자의 삶의 방식을 갖는다. 이는 평생 지속되는 한 개인의 삶의 풍토로서 성격 형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기본적 신뢰에 결함이 있는 의심의 정도와 현실검증 능력에 따라 편집성 인격장애, 망상장애, 편집성 정신분열증으로 나뉜다. 편집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은 매사를 의심의 바탕 위에 올려놓고 생활한다. 항상 경계심으로 무장하고, 자신에 대한 타인의 언행에 매우 민감하고, 주위 사람과 환경에 적대적이다. 앞뒤 재볼 것 없이 무조건 의심하고 배신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젖어 있다. 대인관계에 불편을 느끼지만 나름대로 현실을 파악하고, 그에 맞게 사회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망상장애와 편집성 정신분열증을 가진 사람은 현실검증 능력이 심히 결핍되어 있어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나 의사, 목사가 말을 해도 절대 믿지 않는다. 망상장애는 왜곡되고 고착화된 사고만 보여준다. 한편 편집성 정신분열증은 고착된 사고 외에 환각이나 이상한 언행 등을 보인다.
아이들은 떠나가고, 남편은 직장 일에 바쁘고 피곤하여 부부생활도 뜸했다. 갱년기가 곧 시작된다는 불안감이 그녀의 성적욕망을 자극했다. 아마 그녀의 내면에 감추어진 성적욕망을 무의식적으로 남편에게 뒤집어씌우는 망상체계를 형성했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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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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