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가 커가는 걸 보며 종종 깜짝 깜짝 놀랜다. 손자가 세살 땐가? 갑자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 상을 열심히 바라보더니 ‘저 사람 나쁜 사람이야?’ 하고 묻던 것부터, 또 한참을 바라보더니 아프겠다, 춥겠다, 챙피하겠다.. 하고 혼잣말을 하던 것을 보며 그 어린 나이의 감수성에 정말 놀랬었다. 나는 오랜 세월동안 그냥 늘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분이라고 당연히 생각했는데.
제 에미가 요란하게 머리염색을 했기에 직접 잔소리는 못하고 손자를 붙들고 ‘네 엄마 머리 색깔에 대해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했더니 ‘나도 민망한데 그래도 아무 내색 안했어.’ 하길래 또 놀래 자빠졌다. 또 나도 젊어서는 얼추 영어를 하면서 산것 같은데 점점 영어로 말하는 게 싫고 귀찮아져서 반벙어리 노릇을 했더니만 손자는 나를 타이르듯이 영어도 자꾸 하면 는다고 자기가 가르쳐주겠다고 한다. 지난 봄엔 밖에서 들어오면서 그즈음 새로 돋는 잎새들이 너무 예쁘다고 할머니도 좀 나와서 가만가만 잎새좀 쓰다듬어 보라고 끌고 나간다. 나는 어렸을 때 새 잎이 나오는지 낙엽이 떨어지는지 그런 건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이즈음 아이들이 정보가 많아서 감수성이 예민한걸까? 그 손자가 오늘은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눈물 바람이다. 왜냐고 물으니 자기 반에 예쁜 여자 애가 있어 나중에 결혼 할까 생각 중이었는데 그 애가 이사를 가게 됐다고, 그래서 이번 학기가 끝나는대로 이별이라고 제법 눈물을 떨구며 운다.
손자 때문에 나도 숙연해져서 가만히 지난 세월을 돌아보게 된다. 참 많은 이별과 참 많은 만남이 있었다.
스물 다섯 나이에 미국으로 오게 된 건 내가 겪어야 했던 가장 큰 이별과 변화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당장엔 그게 내 뿌리를 들어다 이곳에 옮겨 심겨지는 거라곤 깨닫지 못했었다. 언제라도 갈수 있고 언제라도 올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세월이 가고 보니 이제 나는 하릴없이 미국 이민자가 되어 있다. 인생은 정말 흐르는 물 같다. 소용돌이 치며 흐르기도 하고 멈출듯 멈출듯 찬찬히 흐르기도 하며 이리저리 바위를 안고 돌기도 하고 그 흐름속에서 마치 부둥켜 안고 함께 가듯 흐르다가도 어느새 저멀리 멀어져 가는 인연들.. 그래서 문득 서서 돌아보는 세월속에 사라져 가는 것들이 애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지난 주말 한인 박물관을 만들고자 하는 이들의 모임이 있었다. 도울 힘은 없지만 참석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사라지는 것을 찾아서’ 라고 내건 문구. 얼마나 많은 것을 시사하는 문구인가. 너무도 시적인 그 문구를 가만히 입안에 굴리며 사라져 가는 모든 걸 하나 하나 불러내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전화도 흔치 않았던 시절, 허위허위 찾아간 먼 곳에 사는 친구. 마침 출타중이면 툇마루에 앉아 물 한사발 청해 마시고 다시 돌아오는 길, 그래도 찾아갔다는 것 만으로도 서운한 맘은 없었다, 그 시절엔.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게 다 해결된다고, 외롭지도 않고 아쉬운 것도 없다고 으시대듯 말하는 젊은 사람을 보며 책 한권을 빌려 밤새워 보고 갖다주던, 안개처럼 기억나는 그 밤의 충일함. 햇볕 밝은 오후, 대청마루에서 여인네들이 마주 앉아 리드미칼하게 두드리던 다듬잇 방망이 소리. 태엽 감아 돌리던 축음기가 태엽이 풀리며 내던 왜앵, 주저앉는 소리. 고물 파세요. 빈병이나 고무신 파세요, 철컥철컥 가위를 놀리던 엿장수 소리. 추운 겨울, 한밤에 야경도는 이들이 내던 딱딱이 소리. 찹쌀떡 파는 소년의 목소리. 구루마를 끌고 다니던 행상이 오이사려, 호박 사려, 열무 사려 를 외치던 골목. 그 모든 것이 이제는 내 기억 속에만 있다.
돌아보니 내가 살아낸 세월은 어쩜 이렇게 정신없이 변했을까.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변화를 이뤄낸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스마트폰 때문에 모두들 눈을 내리 깔고 사는 이즈음 조금 있으면 가상 현실을 보여주는 철벽같은 안경이 사람들의 눈마저 가려줄 거라고 한다. 그럼 그땐 서로 마주보는 눈길마저도 사라질테지...
사라져 가는 것.
사라져 가는 것...
<
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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