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산행 길에서 한 동료가 “주말마다 화창해서 즐겁지 말입니다” 라며 드라마 ‘태양의 후예’ 에 나오는 송중기의 군대식 말투를 흉내 냈다. 그는 또 그날 산행에 빠진 한 회원에게서 “친척 결혼식이 있어서 오늘 산에 ‘못 간다고 전해라’ 는 부탁을 받았다” 고 했다. 이 역시 이애란의 히트송 ‘백세시대’ 에 반복해 나오는 “못 간다고 전해라” 에서 딴 유행어이다.
유행어는 시대마다 있었다. 반세기 전 4 19혁명 후 이승만대통령이 하야하면서 말한 “국민이 원한다면…” 5 16 군사혁명 공약에 나오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노태우대통령의 선거 캐치프레이즈였던 “보통사람 믿어주세요” 노무현대통령의 “이 정도면 막가자는 거지요” 가 유행했고, 최근엔 박근혜대통령의 소통부재를 비아냥한 ‘아몰랑’ 이 떴다.
정치 유행어는 참 많다. 이승만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50년대 민주당 선거구호였던 “못살겠다 갈아보자” 와 자유당의 “갈아봤자 별수 없다(구관이 명관이다)” 외유 길에 오른 김종필의 “자의반, 타의반” 김영삼의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와 그의 집권중 대형사고가 연발하자 “우째 이런 일이…” 라고 탄식한 말이 모두 유행어가 됐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이주일), “잘 돼야 될텐데”(김형곤), “이거 되겠습니까”(구봉서), “요건 몰랐지”(서영춘) 등 코미디언들이 퍼뜨린 유행어도 많았다. 요즘엔 ‘멘붕’ , ‘구구팔팔이삼사’ 같은 신조어 유행어가 뜬다.
하지만 시대상이나 사회상을 반영하는 이런 유행어들은 대부분 우리의 언어문화를 크게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딱딱한 일상의 분위기를 윤활유처럼 매끄럽게 해주며 세월과 함께 서서히 소멸해 간다. 정작 문제는 유행어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언어체계는 물론 사고방식까지도 오도하는 말투이다. 시정되기는커녕 세월이 갈수록 더 확산돼 심각하다.
바로 “것 같아요” 라는 말투다. 한국사회에 홍수를 이룬다. “날씨가 화창해서 기분 좋은 것 같아요” , “식당광고를 보니까 배고픈 것 같아요” , “잘 모르는 것 같아요” , “더 민주당보다 안철수 신당에 호감이 가는 것 같아요” 따위다. TV의 사회자도, 방청객도 똑같은 말투다. “기분 좋다”, “배고프다”, “잘 모른다” , “호감이 간다“ 고 딱 부러지게 말하지 않는다.
얼핏 겸손한 어투로 들린다. 자기와 의견이 다를지 모르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자세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따져보면 그게 아니다. 자기 생각이나 판단을 분명히 밝히지 못하는 비겁한 말투다. 마치 남의 얘기 하듯 얼버무리며 자기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런 말버릇이 몸에 밴 아이들은 판단력과 발표능력이 결여된 줏대 없는 어른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미국인들도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음을 최근 깨닫고 깜짝 놀랐다. 지난 4월30일자 뉴욕타임스 사설란에 ‘것 같다는 말을 하지 말라(Stop Saying I Feel Like)’ 라는 칼럼이 게재됐다. 필자인 몰리 워센 교수(노스캐롤라이나 대)는 요즘 미국인들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십중팔구 ‘I feel like’ 로 말머리를 시작한다며 이는 ‘감정의 횡포’ 라고 꼬집었다.
워센 교수는 상대방의 반박에 대비해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두는 이런 말투로는 대화가 진전되기 어렵다며 ‘것 같다’ 대신 ‘생각한다(think)’ ,‘믿는다(believe)’ 등 의사를 분명히 밝히라고 권면했다. 펜실베니아대의 마크 리버만 교수(언어학)는 일반대중의 통화기록을 분석한 결과 ‘것 같다’ 는 말투를 남자는 3.8%, 여자는 6.7%가 사용했다고 밝혔다.
이런 추세가 늘어날 경우 미국에서 자라나는 우리 후세들도 감염될 우려가 있다. 뭐 그딴 일로 걱정하느냐고 핀잔하는 분도 있겠지만, 말버릇은 너무나 중요하다. 1세들부터 ‘것 같다’ 는 한국식 말투를 쓰지 말아야 한다. 또 전화 끝에 “좋은 하루 되세요” 라거나 “들어가세요” 라는 엉터리 인사말도 없애는 게 좋은 것 같다. 아니,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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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시애틀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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