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승리는 승리다. 0.5 포인트 차이로 간신히 이겼지만 17일 켄터키주 경선결과에 힐러리 클린턴 진영은 안도의 큰 숨을 내 쉬었다. 버니 샌더스의 5월 연승행진에 일단 제동을 건 것이다. 같은 날 오리건 주 경선에선 샌더스가 낙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신승이든 낙승이든 민주당 대선후보를 지명하는 경선 판세엔 별 영향을 주지 않는 이른바 ‘영양가 없는’ 싸움이다.
대의원 계산상으로 이미 ‘불가능’ 판정을 받은 후보지명을 목표로 완주를 고집해온 샌더스는 새로운 모멘텀 주장에 필요한 2개주 압승을 거두지 못했으나, 5월 들어 연달아 패배했던 힐러리는 ‘사실상 후보’의 저력을 입증하기 위해 절박했던 상징적 승리를 거둔 셈이다.
지난 한두주 힐러리는 켄터키에 집중했다. 대의원이 더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인디애나에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5월3일 인디애나 경선에 샌더스가 200만달러의 광고비를 쏟아 부은 데 비해 본선 채비에 들어간 힐러리는 단 한 푼도 쓰지 않았고 패배했다. 그 다음 주 웨스트버지니아에서도 또 패했다. 패배가 이번 주까지 계속됐다면 미디어는 힐러리의 무능을 시끌시끌 조명했을 것이다.
켄터키에선 지난주 11개 지역에서 강행군 유세를 계속했고 200만달러 이상의 광고비를 지출했다. 이기기는 했다. 도널드 트럼프 공격에 써야할 돈과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은 결과다. 힐러리 측근들은 본선에서 필요한 소중한 자원을 경선에서 소비하고 있다고 끌탕을 한다.
요즘 힐러리는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치르고 있다. 다 끝난 경선에 발목 잡힌 채 샌더스를 회유하면서 한편으론 펄펄 나는 트럼프를 공격하자니 힘겹기 짝이 없다. 트럼프가 공화당의 사실상 대선후보가 된지 벌써 2주가 넘었는데 힐러리 진영의 트럼프 공격은 제대로 가열도 안 된 상태다. 샌더스 승리에 미련을 못 버린 샌더스 지지자들을 소외시키는 위험부담 때문에 캠페인 조직을 본선모드로 바꾸기가 조심스러운 것이다.
샌더스의 버티기에 팽팽해지던 민주당 내 갈등이 지난 주말 한 차례 폭발했다. 네바다 주 민주당 컨벤션이 의자가 날아가고 살해협박이 난무하는 난장판으로 변한 것이다. 대의원 규정이 힐러리에 유리하다며 주 당직자들과 맞서던 샌더스 지지자들의 항의가 욕설과 폭력으로 치달았고 네바다 주 민주당 의장에게 살해협박 등 전화와 문자메시지가 쇄도했다.
사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놀란 당 지도부는 샌더스에게 과격한 지지자들을 진정시키라고 요청했다. 샌더스의 대응은 민주당의 우려를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폭력은 지지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시작했으나 샌더스의 긴 성명은 지지자들의 분노를 초래한 당에 대해 개선을 강하게 촉구했다 : “정치세계는 변하고 있으며 수백만 미국인들은 기득권 정치와 기득권경제에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지도부는 알아야 한다. 11월에 승리하려면 당은 우리 지지자들을 공정하게 존중해야 한다”
네바다 난동과 이어진 설전은 민주당의 균열이 상당히 깊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냈다. 훨씬 더 드라마틱했던 공화당 내분에 가려졌던 민주당 집안싸움이 심각하게 악화된 것이다.
지난달만 해도 공화당의 이전투구를 느긋하게 구경하던 민주당인데 뒤늦게 자신들이 진흙탕 싸움에 빠질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공화당이 중재 전당대회 가능성으로 몸살을 앓는 동안 민주당이 꿈꾸어 온 것은 경쟁력 입증된 당 후보를 중심으로 환호하며 단합하는 ‘그림 같은’ 전당대회, 전국의 유권자에게 성숙한 민주당의 저력을 과시하는 전당대회였다. 그런데 ‘샌더스의 버티기’가 힐러리의 발목을 잡으면서 난동을 초래하고 7월 전당대회까지 위협하는 후유증을 낳고 있는 것이다!
유리그릇 다루듯 샌더스 평가에 조심조심 신중하던 당내 인사들의 어조가 하루 이틀 사이 변하고 있다. “분열적이고 양극화된 인물이었어?” 의심의 눈길을 던지기도 하고 “승리할 수 없는 현실인데 왜 부패한 기득권층에 승리를 도난당한 것처럼 암시하느냐?”고 따지기도 한다.
수퍼대의원 규정은 분노하는 샌더스 지지자들이 시사하듯 힐러리를 위한 “음모”가 아니다. 8년 전 힐러리가 오바마에게 패했을 때도 똑같이 적용되었던, 궁극적으로는 본선승리를 위해 마련된 제도다. 현재 힐러리는 수퍼 대의원을 제외한 서약대의원도 샌더스 보다 거의 300명이나 더 확보했고 경선의 총 득표수도 300만표 이상 앞섰다. 비례배분제로 대의원을 나눠가지기 때문에 샌더스는 앞으로 남은 9개 지역 경선에서 다 이긴다 해도 승리할 수 없다.
만만치 않은 라이벌과의 긴 경선이 나쁜 것은 아니다. 선거에 대한 관심도 불러 모으고 유권자에게 후보의 실체를 폭넓게 보여주며 후보자신도 경선의 검증을 거치는 동안 본선에 대비해 내성을 기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지점을 지나면서 장기경선은 득보다 실이 많아진다. 경쟁과열로 불신과 분열이 깊어지면서 본선에 악영향을 초래하기 시작할 때다.
지금 민주당이 그런 듯 보인다. 힐러리의 발목을 잡고 트럼프 공격이 아닌, 힐러리 공격을 계속하는 샌더스의 버티기가 민주당을 불편케 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트럼프는 샌더스의 힐러리 공격을 효과적으로 활용 중이다.
2016년 대선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온 “평등한 세상을 위한 정치혁명의 기수”가 ‘트럼프 대통령’ 만들기에 일조했다는 책임추궁을 당하는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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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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