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 들고 얹혀 여행을 다녀왔다. 개 한 마리 옆에 태우고 하염없이 여행길에 나선 스타인벡, 알라스카를 누비고 다녔던 잭 런던, 성난 젊음을 안고 위태롭게 박치기를 하며 헤메다 ‘길위에서’란 비트문학의 정수를 써낸 잭 캐루악이, 마치 눈은 맞췄으되 시간은 못나누고 헤어진 꿈속의 연인처럼 일생동안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를 서성이게 했었건만, 이제는 그 모든 서성임이 아득한 전생의 그림자처럼 차마 길을 나설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하여, 돈내고 몸만 실으면 되는 여정은 편했다. 이상하게 나는 늘 황량한 곳의 바람소리가 신비롭고 좋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뵈는 건 지평선이고 바람은 울음소리같고 물기라곤 찾아볼수 없는 벌판에 악착스럽게 뿌리내리고 서서 가슴 쓰리게 하잖은 꽃을 피워내는 사막의 야생화는 왜 그리 슬픈것일까.
그리고 그 광활한 벌판위로 쏟아지는 핏빛 낙조.. 매일 대하는 태양. 아침이면 으례 떠오르리라 믿는 태양. 어제도 보고 내일도 볼 것이며 어릴 때도 보아왔고 꼬부랑 노인이 되도 만나게 될 태양. 그 시시한 태양이 아무렇지도 않은 공간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시간속에서 섬뜩, 비수처럼 번쩍인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변하는 눈부신 자신의 자태를 마법처럼 뽑내다 한순간에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듯 시치미 뚝 떼고 무심한 모습으로 돌아간다. 신비로운 자연. 매정한 자연. 황홀한 자연. 아무 말없는 자연이 그 자체로서 전하는 신비도 신비이지만 그 거대한 신비속에 한점 애잔하게 피워내는 생명의 흔적은 슬프도록 아름답다.
티베트에 갔을 때 잉잉대는 바람과 먼지속에서 느닷없이 오색찬란한 깃발들이 휘날리는 모습과 비정하도록 척박한 풍경속에 느닷없이 모습 드러내는 사원들의 화려한 모습은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이 서럽고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그토록 메마른 사막위의 생활 조건에서 그토록 웅장한 사원을 지어내는 마음엔 얼마나 간절한 인간의 염원이 숨어있는 걸까?
화려하고 잘 만들어진 조화보다 바람에 시달리며 조붓하게 피워낸 야생화의 모습은 무어라 말할 수 없이 감동적이다. 거대한 자연. 오랜 시간을 견뎌내며 바람과 태양열과 물에 의해 침식되고 퇴적되며 사라지고 새로워지는 자연의 변화. 그리고 그 변화에 맞서 강인하게 맞서는 인간의 자취는 숭고하고 초월적인 전율을 느끼게 한다.
실크로드 다큐멘트를 보면서도 같은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볼모의 땅위에 남겨진 문명의 발자취, 도자기 한조각, 엽전 몇 개, 무너진 집터.. 자연은 언제나 인간과 겨루고 협력하고 타협하며 싸우는, 한치도 방임힐수 없는 영원한 동반자이며 적수이다.
최근 샌프란시스코 한인 박물관의 필요성을 느낀 몇몇 분들의 움직임이 있다. 무슨 연고인지 내게도 연락이 와서 비디오 인터뷰를 했다. 언제 어떻게 이곳에 자리 잡았는지... 사소한 개인의 이야기를 나눴다. 화가로도 작가로도 아니면 사회적 인물로서도 내가 나갈 순위는 아닌 것으로 안다.
그러나 실상 실크로드에 남겨진 아주 작은 문명의 자취가 모두 징기스칸처럼 만인 위에 우뚝 선 인물들만의 자취는 아닐 것 이다. 어린 아이들이 그린 수백장, 수천장의 그림을 이어 만들어 새로운 그림을 창조해낸 강익중의 작품처럼, 산과 들과 풀과 나무와 작은 동물, 큰 동물을 아울러 생성된 자연의 장엄한 위용처럼, 스치는 사소한 인물들을 한 편 한 편의 시로 그려내 ‘만인보’란 큰 시를 이루어낸 고은처럼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자리 잡은 만명의 이민자들의 인터뷰가 마련되어 하나의 커다란 기념비적인 비디오 작품이 만들어 졌으면 좋겠다.
그런데 지금 이 작업을 하는 이들은 모두 풀타임 직장인으로 주말에 가족들과의 시간을 깍아 먹어가며 만들고 있단다.
그런데도 왜 누구는 인터뷰를 하고 나를 안하나, 하고 섭섭해 하는 분들이 있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이 일이 조금씩 이루어져 그 결실이 맺어지는 동안 일하는 이들이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혹 이 일의 추진 과정을 알고 싶은 분이 있다면 유튜브로 들어가 ‘샌프란시스코 한인 박물관’을 치면 된다.
<
최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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