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라이언, 트럼프의 덫에 걸리다” -
연방 하원의장과 공화당 ‘대선 후보’의 12일 워싱턴 회동을 하루 앞두고 폴리티코는 라이언의 진퇴양난 입장을 이렇게 정리했다.
지난해 10월 미국내 권력서열 3위 하원의장에 오를 때만 해도 라이언 자신은 물론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 난감한 결정에 직면한 것이다 : 자신이 정말 싫어하는 트럼프를 지지해야 하나? 트럼프 반대쪽에 가세해도 될까? 수십년 지켜온 공화당의 정신이 더 중요한가? 막말의 선동가에게 열광한다 해도 저 엄청난 풀뿌리 표밭이 우선 아닐까…
공화당의 사실상 대선후보로 확정된 후 한 주가 채 못 되어 트럼프는 공화당 주류를 사분오열, 혼란에 빠뜨리는데 완벽하게 성공했다! 일부는 새로운 왕 앞에 재빨리 무릎 꿇었으며, 일부는 마지막까지 항거를 다짐하며 ‘트럼프 저지’를 재확인했고, 밀려난 귀족들은 냉담하게 고개 돌리며 트럼프의 대관식이 거행될 전당대회 불참을 선언했고, 이미 다리를 불살라버린 엘리트들은 제3당 후보 물색을 시작했으며, 고위 당직자들은 “그래도 당 후보니까…” 마지못해 트럼프열차에 엉거주춤 올라탔다.
상당수는 심사숙고를 빌미로 말을 아끼고 있다. 트럼프와 거리는 두고 싶은데 그의 극성스런 지지층의 적대감은 사고 싶지 않아서다. 어느 쪽이 유리한가, 정치적 계산의 답이 안 나와 망설이던 이들에게 지원군이 등장했다. 라이언이 지난 주 트럼프가 진정한 보수인지에 확신이 안 선다며 자신은 아직 트럼프를 지지할 “준비가 안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상원 공화당 대표 미치 맥코넬은 “유권자의 보이스를 존중한다”면서 시들하게라도 지지를 선언했는데 당의 단합에 앞장 서야할 최고 리더가 거부를 시사하는 폭탄을 던진 셈이다. 망설이던 의원들은 휴- 시간 벌어 안도했으나 “우리당 하원의장 맞아?”라며 분개한 트럼프 진영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주말 내내 설전이 계속되었고 공화당 ‘내분’은 ‘내전’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당이 꼭 단합해야 하냐?…나도 라이언의 정책을 지지할 준비가 안 되었다…우린 공화당이지 보수당이 아니다”라고 대응한 트럼프는 관례상 하원의장이 맡아온 전당대회 의장자리에서 축출할 수도 있다고 위협했고 라이언은 즉각 마음대로 하라며 “그가 원한다면 사임할 용의가 있다”고 되받아쳤다.
이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았을 트럼프를 대신해 폭탄을 던져준 것은 새라 페일린이었다. “라이언의 정치생명은 끝났다”면서 2014년 중간선거에서 티파티 도전자에 패배한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 “에릭 캔터 꼴이 날 것”이라고 위협하며 라이언의 낙선운동을 선언했다. 물론 경선에서 트럼프에게 참패를 안겨주었던 위스콘신 주에서 81%의 절대적 지지를 누리는 라이언에겐 일고의 가치도 안 되겠지만 트럼프를 대변한다는 대리인의 수준이 그 정도다.
뜨겁던 설전은 주초를 지나면서 조금 가라앉았다. 본선 승리를 위한 표와 돈, 조직의 모든 측면에서 당 지원의 필요성을 실감해 가는 트럼프도, 현실적으로 대안이 없음을 절감하는 라이언도 한 발씩 물러나며 화해를 시도하지 않을 수 없어서다. 그러나 분열된 당의 화합이라는 목표의 완벽한 실현은 쉽지 않을 것이다.
라이언은 트럼프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스타일도, 철학도, 정책도 그냥 다른 게 아니라 거의 반대다. 공화당 영혼의 수호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그는 보수 소신 확실하면서도 기분 좋은 매너로 합의를 끌어내는 소통능력이 뛰어난 ‘나이스 가이’로 통한다. 두 사람의 정책방향 차이는 한마디로 양립불가다. “부채를 사랑하는 부채의 왕”으로 자처하는 트럼프와는 정반대로 라이언은 “적자 없는 미국의 청사진”을 제시한 공화당의 지성으로 꼽힌다. 모든 인종과 모든 종교의 마이너리티를 포용하는 ‘빅 텐트 정당’을 지향하는 그와, 서류미비 이민자 전원 추방과 무슬림 입국금지를 외치는 트럼프가 어떻게 타협해 화합할 수 있을까.
부자증세와 최저임금 인상에서 전 세계를 뒤흔든 무슬림 입국금지에 이르기까지 오락가락 말 바꾸기를 거듭하며 “공약은 변경할 수 있다”는 트럼프에겐 정책의 차이가 승리로 가는 길에 큰 장애는 되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또 바꾸면 되는 것이기도 하고!)
선택의 고충은 온전히 라이언의 몫이다. 트럼프와 손잡으며 오랫동안 지켜온 ‘라이언 브랜드’의 훼손을 감수할 것인가, 트럼프가 자랑하는 29개주 1천만 유권자의 민의를 외면할 것인가.
라이언도 일단은 “힐러리 타도”를 절대과제 삼아 지지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겠지만 오늘 워싱턴 회동 후 곧바로 태도를 표명하진 않을 것이다. 본선을 지켜보며 ‘대선후보’ 트럼프의 패색이 짙어지면 의회의 공화당 주도권을 지키기 위해서도 그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고심하는 공화당 주류에게 한 민주당 인사가 친절히 조언했다 : 이론적으로는 세 가지 옵션이 있다. 눈 꽉 감고 트럼프를 찍거나, 민주당 후보를 찍거나, 기권하거나. 그러나 진정한 옵션은 한 가지 뿐이다. 트럼프에게서 멀어지라. 본선에서 패배하도록 두라. 그가 사라진 후 공화당을 재건하라. 이번 대선은 공화당의 영혼만을 위한 싸움이 아니다. 미국의 내일을 위한 전쟁이다. 그가 공화당 후보라는 이유만으로, 당신이 공화당원이라는 이유만으로 트럼프에게 투표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고 너무 위험한 일이다.
공화당 유권자들이 이 조언을 심사숙고하기를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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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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