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먹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이런 말을 남겼다면 대대손손 입에 오르내리는 명구가 되었겠지만 평범한 정신과 의사인 나의 말이라 별 볼일이 없겠다. 현실적으로 사람은 먹어야 힘도 생기고 생각도 할 수 있어 존재하는 것이지 철학자 같이 생각만 가지고는 존재하지 못한다.
“이 스프 좀 먹어봐라, 맛있게 보인다.”중년부인이 딸애의 눈치를 보며 말한다.“싫어, 배 안고파.” 몸은 나무젓가락처럼 말랐고, 얼굴은 창백한 10대 소녀의 퉁명스런 대꾸다.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은 게 없잖아, 조금이라도 마셔보렴.”“괜찮다니까 왜 자꾸 그래. 그래서 애들이 네 엄만 과잉보호자라고 놀리잖아.”소녀는 거의 신경질적이다.
“너, 그러다 쓰러지면 어쩌려구.”“잘 됐네, 그럼 쿠쿠 병원(정신병원의 거리이름)에도 갈 필요 없으니.”
오래 전에 비행기 안에서 들은 어느 모녀의 대화이다. 둘의 음성은 점점 높아져 승객들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아마 음식을 먹지 않아 비쩍 마른 딸을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유명한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러 가는 모양이었다.
신경성 식욕부전증(Anorexia Nervosa)은 마음이 괴롭고 신경이 예민해져 입맛이 없어지는 병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병의 이름이 잘못 붙여진 것이다. 실제로 이 병을 앓는 환자들은 병의 마지막 단계까지 식욕이 정상이다. 창조주께서 먹으라고 주신 음식들을 멀리하면서 지독한 배고픔과 싸워야 하는 고통스런 정신질환이다. 그들은 뼈를 깎는 의지로 스스로에게 굶주림을 강요한다. 음식을 적으로 알고 머릿속은 단지 체중 줄일 생각만으로 가득하다. 뭔가를 먹고 나면 체중증가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남몰래 토해 내거나 이뇨제 혹은 설사제를 사용하여 음식물을 몸 밖으로 내보내기 일쑤다.
최근 이 병이 급격히 늘고 있다. 이제는 젊은이들, 특히 10대 소녀들 사이에 유행병처럼 되어 버렸다. 날씬함이 미의 표준인 사회에서 매년 수만명의 젊은이들이 희생자가 되어간다. 다행인 것은 병을 일찍 발견해서 치료하면 완전치유가 가능한 정신질환 중의 하나다.
이 병에 잘 걸리는 환자들은 겉보기에 품행이 단정하고, 공부 잘하고, 부모 말에 순종하고, 다른 학생들과 잘 어울리는 모범 소녀들이다. 그러나 속으론 감정이 불안정하고 자신이 없고 칭찬을 받아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자아비판적인 완벽주의 성격의 소유자들이 대부분이다.
원인은 심리적, 정신적 요인과 사회적 문제 때문이라 추측된다. 심리적으로 부모와 주위사람들이 세워 놓은 표준과 규범에 대한 압박감과 반항심, 그리고 항상 일등이 되어야겠다는 내적갈등 등을 원인으로 지적한다. 사춘기의 빠른 신체성장으로 인한 여러 호르몬들의 불균형도 지적되지만 이는 원인이라기보다는 병의 결과로 보아야 될 것 같다. 아울러 마른 몸매가 미의 심벌로 고착된 사회적 환경도 발병 원인의 하나다. 이러한 심리적 사회적 갈등이 음식이란 매개체를 통해 일어날 수 있는 정신질환이 신경성 식욕부전증이다.
환자들은 체중이 몇 달만에 1/4 정도가 줄고 체내 지방질층이 얇아져 여성 호르몬 분비 부족으로 월경이 그치고, 피부는 까칠까칠해지고, 머리털이 가늘어진다. 나중에는 겨드랑이 털과 치모도 없어진다.
대개는 음식을 장시간 조금씩 새 모이마냥 쪼아 먹으나 가끔 게걸스럽게 먹은 뒤 토해낸다. 저체중인데도 열량 소모를 위해 구보, 자전거, 수영 등을 몸이 지칠 때까지 한다.
오직 체중감소에만 신경을 써서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도 멀어진다. 점점 자신감과 자존감의 결핍으로 불안, 우울이 쌓이고 나중엔 평균치 훨씬 못 되는 체중인데도 자신이 뚱뚱하다는 신체 망상 증세와 자살충동도 생겨난다.
증상을 알아차릴 때면 병은 상당히 진전된 뒤라 입원치료를 요한다. 체중이 1/3로 줄어든 경우면 강제입원도 필요하다. 상담을 통해 음식은 적이 아니란 사실과 실제로 자신이 괴로움을 당하는 이유는 가슴 속 깊이 따로 있는데 음식에 덮어 씌워 화풀이하고 있음을 환자에게 인식시켜 주어야 된다.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보다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할까에 관심을 두어 자신감과 자존감도 높여 준다. 간혹 가족들 특히 어머니와의 갈등이 문제가 되어 병이 생기기도 하므로 환자의 치료에 가족을 포함시키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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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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