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 대선주자 테드 크루즈는 3일의 인디애나 경선에 운명을 걸었다. 지난 한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무리수도 서슴지 않는 다양한 전략을 총동원했다. 도널드 트럼프의 후보지명을 막기 위해 라이벌인 존 케이식과 공동전선을 구축했고, 생뚱맞게 칼리 피오리나를 러닝메이트로 발표해 야유의 대상이 되는 위험도 불사했으며 몸 사리는 인디애나 주지사의 지지선언도 받아냈다.
그러나 모두 실패였다. 트럼프의 압승은 투표마감 직후부터 확실하게 드러났고 개표가 채 끝나기도 전에 크루즈는 누구도 예상 못한 전격 하차를 선언했다. “우린 인디애나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는 연설을 마지막으로 크루즈는 사태를 끌고 가는 대신 단칼에 끝내 버렸다.
17명의 후보가 북적대며 1년 넘게 사생결단으로 치고받던 진흙탕 싸움이 갑자기 정지되는 순간이었다. 복잡한 대의원 계산도, 중재 전당대회 논쟁도 그 의미를 상실하며 공화당 경선판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트럼프 저지는 “이제 우리에게 달렸다”던 케이식 마저 하루가 채 지나기 전에 하차를 발표했다.
한때 상상도 안했던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는 이렇게 예상보다 빨리, 예상보다 쉽게 현실이 되었다.
지난해 3월 제일 먼저 공화당 대선 출마를 선언한 후 한참을 중하위권에 머물렀던 45세 연방 상원의원 크루즈는 비호감면에선 트럼프 못지않았으나 상당한 저력을 갖춘 후보였다. 소리 없이 조직을 강화하고 자금을 축적하며 기반을 다진 후 첫 경선 아이오와에서 1위로 전국적 조명을 받았고, 주류의 총애를 받았던 젭 부시와 마르코 루비오 등이 초라하게 퇴장한 후 트럼프에 맞설 ‘유일한 대안’으로 자신을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9개주 경선에서 승리했고 3개주에선 공화당 컨벤션을 통해 트럼프를 따돌리고 상당수 대의원을 챙기기도 했다.
원내 기득권층에 사사건건 반기를 들어온 티파티의 기수로 ‘아웃사이더’를 자처했으나 트럼프의 원색적인 ‘미국 우선’ 인기영합주의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선명한 강경보수인 그는 극우보수 표밭이상으로 지지층을 확대시키지 못했고 그것이 결정적 약점이었다고 공화전략가들은 지적한다. 인디애나에서도 케이식이 양보해준 중도표밭을 흡수하는데 실패했다.
인디애나의 중도표밭 뿐 아니라 앞서 하차한 14명 후보들의 지지층 상당수를 가져간 것은 트럼프였다. 크루즈가 티파티 핵심표밭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때 트럼프는 지지층을 꾸준히 넓히면서 40%에 머물던 득표율을 50% 이상으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트럼프 본선진출 사실상 확정’ 소식과 동시에 성급하게 치달은 ‘트럼프 대통령’ 가능성의 파장은 대단했다. 국내만이 아니다. 해외미군 철수에서 무역협정 재협상 등 우방과의 동맹까지 겨냥하는 그의 안보·경제 공약에 국제사회도 아연 긴장한 모습이다. 물론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공화당이다.
트럼프가 3당 후보로 출마할까 걱정했던 몇 달 전만 해도 공화당 지도부의 고민은 “트럼프를 어떻게 할까”였다. 이젠 ‘트럼프의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각자의 고민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트럼프 공화당원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 -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미 트럼프 열차에 올라탄 리더들도 있고 “트럼프 절대반대” 운동을 계속 펼치겠다는 완강한 반대파도 있지만 대다수는 탑승 여부를 결정 못한 채 머뭇머뭇 관망 중이다. 아직은 공화당의 300명 연방의원 중 12명, 31명 주지사 중 3명만이 트럼프를 지지한 상태다.
아무리 “나 홀로!”를 외쳐온 독불장군이라 해도 ‘대선 후보’ 트럼프의 최우선 과제는 이처럼 제각기 등 돌리고 선 공화당의 단합이다. 트럼프도 3일 밤 승리연설에서 경선을 중단한 크루즈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며 단합의 시동을 걸긴 했다. (그날 아침 크루즈의 아버지가 케네디 암살과 관련이 있다는 주간지 기사를 들먹이며 최악의 모욕을 가했던 트럼프를 크루즈가 쉽게 용서할지는 알 수 없지만…)
트럼프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어릿광대 같은 군소후보로 출발해 16명의 주자들을 물리치고 대선후보에 오르게 된 그의 저력과, 정치권이 방치한 민심의 분노를 제대로 파악하고 다가간 그의 후보역량도 이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이르는 동안 그는 인종차별 모욕과 외국인 및 여성 혐오증을 마구 뿜어내며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막말과 기행으로 미국의 가치관과 ‘대통령 직’의 품격을 훼손했으며, 과연 나라를 맡겨도 괜찮을까 싶은 무지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본선은 그에 대한 여성과 소수계의 적대적 혐오감이 기다리고 있는 살벌한 전쟁터다. 경선에서처럼 ‘모욕 공격’으로는 역전노장 힐러리를 이길 수 없다고 보수신문 월스트릿저널도 지적한다. 단합된 지지 없는 승리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등 돌린 보수주의자들을 설득해 당을 단합시켜야할 책임은 이제 당 후보가 될 트럼프의 몫이다. 성숙한 타협으로 그들을 달래야 하는데 원색적인 막말 공격을 빼버린다면 트럼프의 흥행엔 무엇이 남을까.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트럼프의 세상’에서 살아남기는 트럼프 자신에게도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
박 록 주필>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