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지갑은 나처럼 늙었지만 나와 달리 날씬하다. 브라운색인데 1달러짜리 ‘그린백(Greenback)’만 몇 개 들어 있다. 신문이나 커피를 살 때, 노상주차 할 때, 여기저기서 손 내미는 홈리스들과 마주칠 때 요긴하다. 손자손녀의 재롱 구경 값으로도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크레딧카드보다 더 자주 쓰는 1달러 지폐에 누구 얼굴이 그려져 있는지 가끔 아리송해진다.
지금 확인해보니 국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다. 5달러 지폐엔 아브라함 링컨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역대 가장 위대한 두 대통령의 얼굴이 가장 밑바닥 단위의 돈에 찍혀 있다. 국민들 사이에 가장 자주 쓰이며 가장 많은 사랑을 받기 때문일 터이다. 링컨의 초상은 페니(1센트 동전), 워싱턴의 초상은 쿼터(25센트 동전)에도 각각 새겨져 있다.
워싱턴의 1달러 지폐는 평균 수명이 22개월이다. 그만큼 혹사당한다. 전체 신조 지폐의 45%가 1달러짜리다. 반대로 토머스 제퍼슨(3대) 초상의 2달러짜리는 있는지도 모를 만큼 드물다. 링컨은 금으로 상환되는 사설 은행권을 없애고 처음으로 정부 지폐(달러)를 발행한 주인공이다. 당시 달러 뒷면이 초록색으로 인쇄돼 붙여진 ‘그린백’ 별명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고액권일수록 별 볼일 없는 대통령들의 초상을 담고 있다. 5000달러짜리는 제임스 매디슨, 1000달러는 그로버 클리브랜드, 500달러는 윌리엄 매킨리의 얼굴이 올라 있고, 사실상 최고액권으로 내 지갑과는 인연이 먼 100달러짜리는 대통령도 아닌(하지만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인) 벤자민 프랭클린, 50달러짜리는 율리시스 그랜트의 얼굴로 각각 장식돼 있다.
쓰임새가 넓어 위조율도 높은 10달러와 20달러짜리 초상의 주인공들이 엊그제 생사의 갈림길에 섰었다. 20달러엔 앤드류 잭슨 대통령, 10달러엔 대통령이 아닌 알렉산더 해밀턴 초대 재무장관의 초상이 담겨 있다. 연방 재무부는 당초 해밀턴을 다른 인물로 바꾸려 했다가 브로드웨이 히트 뮤지컬 ‘해밀턴’의 인기를 의식해선지 대신 잭슨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잭슨을 대체할 인물이 매우 이채롭다. 또 다른 대통령이 아니라 노예제도 철폐운동가였던 해리엣 터브먼이다. 그녀는 흑인으로는 물론 여성으로서도 130년 만에 처음으로 달러의 앞면을 장식하는 영예의 주인공이 됐다. 탈주 노예 출신인 터브먼은 비밀조직인 ‘지하 철도’를 10여년간 이끌고 남부지역에 신출귀몰하며 다른 노예 300여명의 탈주를 도왔다.
이제까지 달러의 앞면을 장식한 여성은 초대 퍼스트레이디인 마사 워싱턴뿐이다. 1886년 발행돼 1957년까지 유통된 1달러짜리 은증권(Silver Certificate)이다. 로사 파크(흑인 인권운동가), 일리노어 루즈벨트(퍼스트레이디) 등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인기투표로 뽑힌 터브먼은 달러에 등극하는 실질적 첫 여성이다. 더구나 사용빈도가 높은 20달러짜리다.
놀랍게도 한국은 여권신장 면에서 미국을 압도한다. 여성 대통령을 먼저 배출했을 뿐 아니라 이미 7년 전 신사임당의 초상을 원화 앞면에 사용했다. 그것도 최고액권인 5만원짜리다. 진짜 첫 사례는 그보다도 반세기 전이다. 어머니와 아들이 저금통장을 들고 있는 사진의 100환권을 조폐공사가 1962년 발행했다. 이 돈은 화폐 개혁으로 고작 24일간만 유통됐다.
하지만 미국도 맹추격 태세이다. 달러의 위조방지를 위해 새로 삽입될 9명의 초상 중 8명이 여성이다. 남자는 마틴 루터 킹 목사뿐이다. 터브먼 외에 모두 달러 뒷면을 장식한다. 5달러짜리엔 루즈벨트, 마리안 앤더슨(성악가), 킹 목사가, 10달러엔 소주너 트루스, 수잔 앤소니, 엘리자베스 스탠튼, 앨리스 폴, 루크레시아 모트 등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이 장식한다.
미국의 첫 여성대통령이 될 공산이 커지는 힐러리 클린턴은 내각의 절반을 여성으로 채우겠다고 호언했다.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초의 인기가 간 데 없다. 신사임당의 5만원권도 그렇다. 부자들 사이에 비자금이나 뇌물용으로 인기지만 서민들엔 그림의 떡이다. 내게도 그렇다. 내 낡은 지갑엔 그에 상당하는 그린백(50달러)이 좀체 입주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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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시애틀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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