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여름처럼 덥더니만 다시 바람불고 춥다. 한국의 추위는 이게 추위의 본모습이다, 하는듯 정직하게 추운데 산호세의 추위는 슬금슬금 옷깃 사이로 스미는 게 표현하기도 어렵다. 온도계의 숫자로 설명이 안되는 게 산호세의 기후다. 이것 저것 나가봐야 할 일이 있는데 바람부는 창밖을 내다보니 영 나가고픈 마음이 안든다.
날씨가 이런데도 그 할머니가 우리 집 앞을 지나는 모습이 보인다. 성성한 백발은 부스스 휘날리고 한창 젊었을 때는 육체파 소리 들었음 직한 큼직한 가슴은 이제 축 늘어져 한 걸음 뗄 때마다 빈 가방처럼 출렁거린다. 너덜너덜한 티셔츠는 구멍이 여기저기 있을 것 처럼 남루하다. 창문을 통해서도 운전을 하고 있을 때도 그 할머니는 종종 시선에 들어온다. 아마 하루에 적어도 대 여섯번은 눈에 띄는 것 같다. 앞마당에서 풀을 뽑고 있을 때 지나가면 무어라 말을 거는데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가 힘들어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게 된다. 지난 해엔 건강이 안좋아 한동안 볼 수 없었는데 힘겹게 조금씩 걷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최근엔 다 나았는지 다시 하루에도 열 두번씩 볼수 있다. 그 할머니는 집앞을 지나가며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집 주위에 있는 나무를 한 그루 한 그루 더듬기도 하고, 양귀비 꽃이 우리 집 주변을 구름처럼 감겨있던 때는 지날 때마다 한 송이 한 송이, 마치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강복주듯, 잠시 서서 두 손을 얹고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 할머니를 볼 때마다 나이들면서 매력적인 모습을 지니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구나 싶다.
그런데 며칠 전 앞집 여자로 부터 그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내 눈에 꼭 반 쯤은 미친 여자로 보이는 그 할머니가 젊어서는 시에라 클럽에서 하이킹 리더였단다. 게다가 피아노를 제법 프로급으로 잘 친단다. 시에라 클럽이라니! 내가 얼마나 동경하던 클럽이었는데.. 게다가 나는 피아노라면 도레미도 못친다. 그렇건만 지금도 몰래 시에라 클럽의 잡지를 숨겨놓고 소꼽장란하듯 들여다 보며 왜 내 젊은 날엔 그런 시간을 즐길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가, 통탄하며 들여다 보고 또 들여다보며 아쉬워 한다.
창피했다. 내가 누구를 붙들고 그 할머니 흉을 본적은 없건만 마치 누가 내 속을 들여다 본 것처럼 부끄러웠다. 늘 사람의 겉모습에 속지 말아야 한다고 나름 자신에게 다짐하며 살건만 왜 늙어 부들부들 떠는 노인들은 일단 시시해 보이는가. 예수님은 변장의 귀신이라던데 나는 그런 변장을 꿰뚫어 볼 혜안은 없는 그릇임이 분명하다. 오래 전 한국일보 엘에이판에 나온 기사였다. 65세 먹은 할머니가 은퇴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혼자 산에 다니기 시작하여 엘에이에서 시애틀까지, 시에라 산맥을 종주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혼자 산에 다니는 게 꿈이었으면서도 도저히 혼자 나설만치 담대하지 못한 나는 그 기사를 꼬깃꼬깃 손에 들고 그 분을 찾아가는 공상을 하곤 했다.
나이든다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간혹 65세 넘어서 시에라를 종주할 수 있는 이들도 있고 90이 넘어서도 김 형석 교수님처럼 멋있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성취를 증거처럼 보여줄 게 없는 보통 사람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나.
얼마 전 몇몇이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언제까지 사는 게 좋은 건가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어떤 분이 남에게 도움을 줄수 있을 때까지, 라고 답을 했다. 문득 어느 수녀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일생을 수도자로 남의 본보기가 되었음직한 분이 말년 십년을 자리 보존하고 사셨다. 후에 그 분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도 할수 없는 상황, 남의 손으로 자신의 오물까지 치우게 한, 굴욕과도 같았던 그 세월이 없었다면 죽는 날까지 진실된 의미의 겸손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라며 자신에게 그런 시간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한다는 말씀을 했다. 뼈속까지 철저히 항복한다는 것, 자신이 먼지에서 와 먼지로 가는 존재임을 철저히 깨닫는다는 건 신의 은총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
최정>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