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만차는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남동쪽으로 100마일 정도 떨어진 지역이다. ‘스페인에서 가장 평범한 곳’이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평범한 이곳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한 것은 실제로 여기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소설 속에 존재하는 가공의 인물이다.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의 주인공 라 만차의 기사 돈키호테가 그 사람이다.
아랍어로 ‘광야’를 뜻하는 이 지역은 스페인에서 가장 넒은 평야가 있는 곳으로 지금도 수많은 양떼와 풍차를 볼 수 있다. 소설 속에서 돈키호테가 양떼를 군대로 오인해 공격하고 풍차를 거인으로 보고 돌격하는 에피소드가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성경 다음으로 널리 번역되고 2002년 노벨 연구소가 세계 주요 문인들을 상대로 한 여론 조사에서 ‘가장 위대한 책’ 1위로 뽑힌 ‘돈키호테’는 마크 트웨인이 말한 고전의 정의인 “모든 사람이 그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읽지는 않는 책”에 딱 들어맞는다. 유치원생부터 대학원생까지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 책을 다 읽은 사람은 별로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한글 완역본으로 1,5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만 해도 방대한 데다 비슷한 이야기가 수없이 반복되고 어떤 경우에는 앞뒤가 잘 맞지 않아 세르반테스 자신도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착각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 평론가는 이 책을 집에 찾아온 반갑지 않은 늙은 친척에 비유하면서 돌아갈 생각은 하지도 않고 지저분한 친구들까지 불러 들여 한 얘기를 또 하며 사람을 지치게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대다수 문인들의 이 책에 대한 평가는 확고하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는 “이보다 힘 있고 심오한 작품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으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유명한 밀란 쿤데라는 “모든 소설가는 세르반테스의 자식”이라고 주장했다.
어째서 얼핏 보면 혼란스럽고 복잡하며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 책이 이처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의 하나는 이 책이 풍차와 양떼의 에피소드에서 보듯 어린 아이도 알 수 있는 이야기를 통해 외양과 실체, 현실과 이상, 존재와 당위 같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또 여기 등장하는 수백 가지 격언은 시대가 변해도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 중 몇 개를 소개하면 “고양이와 노는 사람은 할큄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손 안에 든 새 한 마리가 밖에 있는 두 마리보다 낫다” “내일은 새 날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성숙하게 만든다. 태어날 때부터 현명한 사람은 없다”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이 지금까지 읽히는 큰 이유는 무엇이 진정 값있는 삶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돈키호테의 하인인 산초 판자는 원래 먹는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편력 기사인 돈키호테와 함께 길을 떠난 것도 한 고을의 영주 자리를 약속받았기 때문이며 ‘판자’라는 이름 자체도 ‘밥통’이란 뜻이다.
그러던 그가 돈키호테와 수많은 모험을 함께 하며 세상은 밥이 다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돈키호테는 나중에 자기가 환상에 사로잡혀 헛고생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회한 속에 숨을 거두지만 산초는 오히려 돈키호테에게 높은 뜻을 버리지 말고 다시 모험을 떠날 것을 호소한다.
산초가 한 섬의 총독으로 부임하는 에피소드에서 돈키호테는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정의와 자비를 들며 둘 다 신의 속성이지만 그 중에서도 자비야말로 인간에 더 부합하는 덕목이라고 가르친다. 기사의 존재 이유는 약자를 돕고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이를 위해 집을 나선 돈키호테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환멸 속에 생을 마감하는 것은 이 작업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말해준다. 돈키호테가 미친 인간으로 나온 것은 아마도 제 정신을 가진 인간은 이런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꿈을 포기한다는 것은 미친 일이다. 어쩌면 너무 제정신인 것이야말로 미친 것인지 모른다. 가장 미친 것은 세상을 마땅히 그래야 할 곳으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라고 세르반테스는 말한다.
지난 23일은 세르반테스가 죽은 지 400년이 되는 날이었다. 유네스코는 셰익스피어 기일과 같은 날짜인 이 날을 ‘세계 책의 날’로 정해 기리고 있다. 그의 명복을 빈다.
<
민경훈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