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좋아했던 미국애는 오똑한 콧날의 청순해 보이는 금발머리 소녀였다. 나이가 스무살 정도였으니 소녀라고 하기엔 조금 그렇지만 미국애 치고는 아담한 몸매가 소녀처럼 귀여워 보이는 애였다.
그녀는 늘 친절했고 볼에도 가벼운 키스를 해 주면서 전형적인 미국애 특유의 넘치는 애정표현을 과시했다. 문제는 그 넘치는 애정 표현이 나 하나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녀의 데이트 명록에는 허다한 리스팅이 올라있었는데 퇴근시간만 되면 늘 두 세 명의 놈팡이들이 나타나 늑대눈을 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때로는 빨간 스포츠카, 때로는 우람한 오토바이의 사나이들이 그녀를 데리고 어디론가 먼… 파라다이스로 사라지곤 했다.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는 (퇴근시간만 되면 한마디로 새 된 거지 뭐…) 프레이보이들 사이에서 지쳐버린 그녀의 정서적… 안주감정도였다고나할까.
지금도 그 때일을 생각하면, (별로인 IQ지만)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그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정의하기가 힘들다. 그녀를 질투했다고 하기엔 그녀와 나는 너무도 동떨어진 세계에 살고 있었다.
마리화나와 남자—그 외에 것에 그녀가 관심을 가진 모습을 본적이 없고 또 그러한 삶에 대해서 절망해 하는 모습도 본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늘 당당했고, 적어도 사랑의 문제에 대해서만은 거리낌이 없었고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그녀는 전형적인 미국애였고 나는 전형적인 동양애… 그녀가 줄리엣이 되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사랑이란 죄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가슴아파야 하는지… 또 그래야 위대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사랑은 적어도 대상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신비가 없이는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물론 그러한 사랑이 실체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사랑이 실체하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그것은 너무나 주관적이며 일시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로미오와 줄리엣’ … 그것이 고전으로 남아있는 것도 사랑이란 그저 하나의 추억으로만 남을 뿐인, 그 아쉬움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첫사랑이란 늘 청춘의 시절에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꼭 처음이란 의미보다는 인간은 젊을 수록 환상을 품을 수 있는 꿈의 존재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로미오와 줄리엣’하면 (1968년도 영화) 올리비아 핫세가 떠오르는데, 나의 첫사랑도 핫세처럼 예뻤었다. 청소년시기, 우리집은 다소 어려운 시기를 거쳐간 적이 있었는데 육개월 정도 병원에 누워있다가 퇴원했을 때 아버지는 벽면을 수많은 성화들로 도배해 주셨다.
아마도 아들이 종교적인 희망을 안고라도 빨리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때문이셨을 것이다. 비몽사몽… 어두운 나날에서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을 때 탁구대가 있던 (동네)교회마당에서 그녀와 마주쳤다. 아마도 긴 시간을 아프고 난 때문이었을까, 안개 걷히듯 말끔히 걷힌 영혼에 비친 그녀는 모습은 이세상의 사람이 아니었다.
긴 머리에 짧은 치마… 흰 부라우스를 입은 그녀의 (봉긋한)가슴은 무한한 모성애와 형이상학적 (도취의) 신비가 있었다. 토요일밤의 소녀였다는 것밖에 그녀가 누구였는지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그녀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도 쓴웃음이 나온다.
물론 신기루처럼 꺼져버릴 물거품의 환상이었지만 지금도 가끔 영화음악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제곡을 듣고 있으면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쓴웃음을 짓곤 하는데, 아마도 절박했던 환경이 탄생시킨 메타피직(형이상학적) … 기적은 아니었는지.
삶에서의 파라다이스는 도취이지 조건은 아닐 것이다. 삶은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 수록 아픈 향수… 무한한 환상으로 이끌어가곤 한다. 1966년, 핫세가 5백대1의 경쟁을 뚫고 줄리엣에 캐스팅됐을 때 그녀의 나이 겨우 15세였다.
핫세의 핫한 매력… 후랑코 감독의 뛰어난 연출, 아름다운 영화음악 등을 등에 업은 이 작품은 지금껏 사상 최고의‘로마오와 줄리엣’영화로 평가 받고 있다. 당신의 줄리엣은 누구였는가요? 푸릇했던 시절를 떠올리며… 어둡고 가슴 아픈… 영화음악‘로미오와 줄리엣’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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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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