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건망증 때문에 낭패를 보았거나 황당한 경험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기억력의 기능이 떨어져 생기는 현상을 건망증이라 한다. 건망증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망각이 있다. 망각은 기억력의 감퇴에서 오는 건망증과는 다르며, 누구나 경험하는 정신 현상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내 잊히는 망각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망각의 유익도 적지 않다. 기쁨, 아픔, 슬픔 등 일상의 모든 일들을 잊지 않고 다 기억하며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망각 덕분에 훌훌 털고 다시 일어나고 다시 웃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인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면 망각이 반드시 유익하다고 볼 수는 없을지 싶다. 사회적 망각은 개인의 망각과 의미가 다르다. 민족이나 국가 등 한 공동체의 자랑과 부끄러움, 슬픔과 아픔은 잊지 않고 기억되어져야 한다. 시간이 지나도 잊지 않으려는 사회적 망각 방지의 노력이 곧 역사의 기록이요 각종 기념일일 것이다.
16일은 세월호 참사 2주기였다. 2년 전 희생자 유가족은 황망한 슬픔 속에 하염없이 눈물 흘렸고, 모든 국민은 몇 달을 애도했고, 원인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소리가 드높았고, 생명을 경시 하고 돈을 중시한 사회적 풍조에 대한 반성이 일었고, 정부의 무능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 그 뿐이었다. 어쩐 일인지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은 아직도 지지부진하다.
벌써 2년이 지났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세월호는 아직도 인양을 기다리고 있고, 참사의 원인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책임자에 대한 처벌도 두루뭉술하다. 사회적 재난에 대한 구조시스템이나 생명 존중을 위한 사회적 분위기도 크게 변화를 느끼기 어렵다. 어떤 사람은 미래를 이야기 해야지, 이미 지나간 세월호 사건을 이야기 하느냐고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고국의 밝고 자랑스러운 소식 놔두고, 하필 왜 그 어둡고 슬픈 사고를 또 언급하느냐고도 한다. 이제 그만 잊어야 한다며 망각의 원리에 맡겨 두고 덮고 가자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는 결코 덮거나 망각되어서는 안 된다.
세월호 참사는 희생자와 유가족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참사이다. 이미 지나간 참사가 아니요,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회적 반성이 없으면, 곧 회개하지 않으면(루가13:3) 언제든 반복될 수 있는 일이다. 어느 사회든 사회적 망각은 그 사회에 대형 부정과 비리, 안타까운 참사 그리고 부끄러운 역사의 반복을 가져 올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가족이나 선량한 이웃이 그 끔찍한 참사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세월호 사건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 여러 교통 사건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그 속에는 우리 사회의 타락과 비리와 모순이 그대로 응축되어 있다. 인간의 생명보다 기업 이윤을 우선하는 풍토, 승객과 배를 버리고 도망간 선장에게서 볼 수 있는 형편없는 직업윤리나 무책임, 만연한 안전 불감증,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국가의 구조시스템 등등 시급히 고쳐야 할 도덕적, 사회적, 제도적 병폐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이하여 실체적 진실이 규명되고, 책임 소재가 명명백백 밝혀져야 한다. 그것이 곧 희생자의 죽음에 대한 추모이며, 희생자와 실종자 유가족에 대한 위로가 될 것이다. 나아가 세월호 참사를 통하여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paradigm)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사람이 먼저인 세상, 생명의 존엄성과 안전이 중시되는 사회, 개인의 도덕성이나 직업윤리 나아가 사회의 모든 제도 속에 ‘사랑’이 자리 잡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세월호 참사 2년이 되었음에도 진상규명 촉구, 다큐 영화, 기도회 등으로 진실을 밝히기 위하여 끊임없이 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분들이 있다. 친숙한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 아들의 제안으로 ‘세월호 기억의 숲’도 조성되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이 시대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들이며, 이들의 행동은 실종된 진실과 사랑을 인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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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석/ 성공회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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