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한 표 행사 후 자긍심 한층 높아진 위스콘신 유권자들의 경선 소감은 요즘 한국에서 유행한다는 한마디로 표현될 수 있을 듯하다 : “우리가 해냈지 말입니다”
극단적 선동에 현혹되기를 거부하고 공화당 대선판을 흔들어대는 트럼프 광풍의 고삐를 일단 잡은 것이다. 지난해 6월 중순 “멕시코 이민은 강간범”에서 시작해 3월 말 “낙태여성 처벌”에 이르기까지 다른 후보라면 한 번에도 추락했을 온갖 막말을 30여 차례나 쏟아놓으면서도 요지부동의 지지를 누렸던 선두주자 도널드 트럼프가 5일 위스콘신 프라이머리에서 테드 크루즈에게 48% 대 35%로 참패당했다.
위스콘신 경선의 최대 관전 포인트였던 트럼프 패배의 의미는 간단하지가 않다. 당 주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필연적 후보’로 주장할 수 있었던 상징적 승리의 기회와 경선 통해 후보지명에 필요한 대의원을 확보할 수 있었던 기회를 동시에 날려버린 것이다. 어떤 악재에도 타격입지 않는다는 ‘테플론 정치가’의 신화도 무너졌으며 궁지로 몰리는 상황에서 엉성한 선거조직의 약점도 민망하게 드러났다.
크루즈의 승리로 ‘중재 전당대회’ 개최는 이제 가능성을 넘어 유력해졌다. 경선 승리를 거듭해온 선두주자라 해도 득표율 35% 안팎에 머물러온 트럼프에게 7월 전당대회전 대의원 과반수를 확보하는 것은 계속 힘든 과제였는데 이젠 더 어려워진 것이다. 당 지도부가 깊숙이 개입하는 중재 전당대회에서의 트럼프 후보 지명은 더욱 기대하기 힘들다.
중재 전당대회에선 과반득표가 나올 때까지 몇 번이고 표결을 거듭해야 한다. 투표에 참여하는 대의원들의 특정후보에 대한 서약은 1차 표결에만 적용된다. 중재 전당대회의 2차 표결부터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측하기 힘들다. 새로운 후보가 등장할 수도 있고 각 후보 간의 대의원 포섭도 치열해 질 것이며 최종 결과에 대한 반발이 격화되면서 일대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위스콘신에서 트럼프가 아주 죽을 쑨 것은 아니다. 자신의 고정 지지층은 잃지 않아 35% 득표율은 유지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지지층을 확대할 수 없다면 경선에서건, 전당대회에서건 ‘과반의 지지가 필요한’ 후보 지명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독불장군 트럼프의 선거조직이 얼마나 허술한가는 대의원 계산에서도 나타났다. 3월1일 수퍼화요일 노스다코타 경선에서 승리한 것은 트럼프였지만 지난 주말 열린 주 당원대회에서 선출한 대의원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크루즈였다. 각 주마다 다른 복잡한 대의원 배분 규정을 트럼프 진영은 숙지하지 못한 것이다. 서약 대의원, 비서약 대의원, 도중하차 후보들의 대의원, 수퍼 대의원 등 여러 종류의 대의원들이 각 주마다 다른 규정으로 얽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중재 전당대회 규정은 거론할 여지도 없다.
이런 면에서 크루즈는 용의주도하다. 2008년 오바마 승리의 주요 비결이었던 빈틈없는 대의원 계산을 답습하며 루이지애나에서도 승자인 트럼프보다 2위인 그가 대의원을 10명이나 더 챙겼다. 전당대회 규정에도 철저하게 대비, 후보지명 받으려면 최소한 8개주 경선승리 전적이 있어야 한다는 대회규정 ‘룰 40’을 바꾸려는 움직임에 이미 결사반대를 다짐하고 있다.
이번 승리로 자신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생겼지만 크루즈에게도 갈 길은 멀다. 여러 갈래의 반트럼프 운동도 통합해야 하고 3위인 존 케이식 요소도 제거해야 하며 무엇보다 극우보수에 한정되었던 자신의 지지층을 확대해야 한다. 그래야 중재 전당대회가 열리더라도 당 주류에게 “나밖에 없다”고 큰 소리 칠 수 있다.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가 되지 못한다면 위스콘신은 그의 ‘워털루’로 기억되면서 이번 패배는 뼈아픈 후회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위스콘신이 트럼프 추락의 시작인지는 아직 단언하기 이르다.
트럼프는 21개주에서 승리를 거둔 확실한 선두주자다. 6일 현재 그가 확보한 대의원은 746명으로 과반수인 1,237명엔 모자라지만 510명에 머문 크루즈보다는 앞서 있다. 경선 일정도 상당히 친화적이다. 다음 4월19일 경선지가 홈그라운드인 뉴욕이며 또 한 주 뒤엔 펜실베이니아 등 북동부 5개주로 이어진다. 모두 강경보수인 크루즈가 어필하기 힘든, 친 트럼프 지역이다. 트럼프의 지지율도 크루즈의 두 배가 넘을 만큼 압도적이다.
위스콘신 패배 후에도 이들 지역에서 리드를 지키려면 트럼프에겐 새로운 모멘텀이 필요하다. 뉴욕에서 압승하고, 제3당 출마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위협하고, 자신이 깨어낸 새로운 표밭을 홍보하고, 무엇보다 더 이상 악재를 만들지 않도록 ‘대통령다운’ 언행을 갖추고…‘대선판의 무법자’인 그에게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본 어게인 트럼프’도 효과적일 것이다.
새로운 인물이 추대되지 않는 한 이제 공화당의 현실적 옵션은 트럼프 아니면 크루즈다. “트럼프 보다 더 싫다”는 크루즈 혐오증이 아직 채 가시지도 못했는데…위스콘신 출구조사에서 트럼프나 크루즈가 당후보가 되면 본선에서 힐러리나 제3당 후보를 찍든지 기권하겠다는 37%의 응답이 공화당의 고민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런 고민을 위로해야할지, 68년 만에 처음이라는 중재 전당대회를 살아생전에 구경하게 되었다고 신나해야 할지 2016년 대선은 참 이상한 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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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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