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길을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와 소와 양을 기른 유럽이민 조상들은 허구한 날 약탈자와 전쟁을 치러야했다. 원주민 인디언이 아니다. 목장을 습격해 육축을 물어 죽이는 회색늑대 떼였다. 카우보이들의 도륙으로 거의 멸종단계까지 갔던 그 늑대가 요즘 서북미 지역목장에 다시 출몰하지만 목축업자들은 속수무책이다. 연방정부의 보호동물이 됐기 때문이다.
대략 200여년 후 역시 살길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와 목장 아닌 구멍가게 그로서리를 차린 한인이민자들도 전혀 다른 부류의 약탈자와 전쟁을 치러야 했다. 대다수 한인업소들이 빈민지역에 자리잡은 탓에 허구한 날 동네 불량배들이 드나들며 진열대의 물건을 아무렇지 않게 훔친다. 권총강도에게 그날 수입을 몽땅 빼앗기는 허망함도 비일비재로 겪는다.
흑인고객들의 고약한 손버릇을 눈엣가시처럼 여긴 한인여성 업주가 LA에 있었다. 어느 봄날 오후 한 흑인 여고생이 가게에 들어와 쿨러에서 2달러짜리 오렌지주스 한 병을 꺼내 태연히 자기 백팩에 넣고는 출구 쪽으로 걸어왔다. 그녀를 지켜본 업주는 오렌지주스를 회수하려고 여학생의 옷과 백팩을 붙잡았고, 여학생이 맞대응하면서 몸싸움으로 비화했다.
당시 16세였던 흑인 여고생은 49세였던 한인업주보다 덩치가 훨씬 컸다. 여학생의 강펀치를 두 차례 얼굴에 맞은 업주는 나가떨어졌고, 소녀는 주스 병을 계산대에 놓은 후 출구로 걸어갔다. 화가 난 업주가 소녀를 향해 뒤에서 권총을 쐈고, 뒤통수에 총을 맞은 여학생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꼭 4반세기 전인 1991년 3월 16일에 발생한 ‘두순자 사건’이다.
당시 업소의 CCTV에는 여고생 라타샤 할린스가 돈을 손에 들고있는 모습이 찍혔다. 두씨는 그녀의 손을 보지 않고 오렌지주스가 들어 있는 백팩만 바라봤던 모양이다. 할린스는 다짜고짜 자기를 도둑 취급하며 백팩을 붙잡는 두씨에게 화풀이 하고는 물건을 사지 않겠다며 가게를 나가다가 뒤에서 총격을 받고 불귀의 객이 됐다. 참으로 어이없는 사건이다.
그러나 재판결과는 뜻밖이었다. 검사는 비무장, 비저항의 미성년자를 뒤에서 총격한 두씨에게 16년을 구형했지만 판사는 집행유예 5년에 사회봉사 400 시간을 판결했다. 업소 주변의 캄튼 주민들은 “흑인생명이 2달러 가치도 없느냐”며 항의했다. 한인사회엔 명 판결이라는 찬사와 함께 한-흑 커뮤니티를 이간질하려는 고의적 판결이라는 음모론도 나돌았다.
만 1년 후인 1992년 4월 29일 LA 사상 최악의 무장폭동이 터지면서 이 음모론이 힘을 받았다. 흑인 부랑자 로드니 킹을 집단 구타한 백인경관 4명이 모두 무죄판결을 받자 흑인들이 1년 전 두씨의 무죄판결까지 싸잡아 항의하면서 한인업소들을 무차별 방화, 약탈했다.
엿새간 이어진 폭동으로 초래된 7억여 달러의 재산피해 중 절반이 한인들 몫이었다.
지난주 시애틀 남쪽 스패나웨이의 한 한인업소에서 도둑질하던 흑인청년이 업주의 총격으로 숨졌다. 정당방위라는 업주 김민식씨의 주장이 일리 있었다. 주차장에 진 친 불량배들 중 2명이 가게에 들어와 담배를 훔치려 했고, 그중 한명과 몸싸움을 벌였다. 7개월간 영업하며 강도를 세 차례나 당했다. 지난달 강도에게 총격당한 부인은 아직도 치료 중이다.
하지만 CCTV의 내용은 김씨 주장과 거리가 멀었다. 몇 초간 몸싸움이 있었지만 김씨는 달아나는 청년을 향해 뒤에서 두발을 총격했다. 두순자 사건의 복사판이다. 검찰은 현행범이라도 비무장상태로 달아날 때 뒤에서 총격한 것은 범죄라며 김씨를 2급 살인혐의로 기소했다. 두씨 사건 때와 다른 점은 이웃 주민들이 김씨의 입장을 옹호한다는 사실이다.
김씨도 두씨처럼 생명의 위협을 느낀 것으로 인정된다는 배심의 평결을 받고 무죄 방면되면 좋겠다. 더 절실한 건 사건의 후유증 예방이다. LA 흑인사회는 지난달 라타샤 할린스의 피살 25주년 추모행사를 가졌다. 3년 전엔 일부 흑인들이 무고한 한인업소를 두순자 업소라며 불매운동을 벌였다. 4반세기 전 한-흑 갈등의 응어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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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시애틀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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