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닉에 올 때 마다 꼭 배낭을 메고 오는 젊은 환자가 있었다. 처음에는 궁금하여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행복을 찾아다니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른 환자들에 비해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대학입학 전에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부모 말에 의하면 여자 친구와 결별한 후 딴 사람이 되었다. 당시 밥 먹고 자는 것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허공만 쳐다보고 있어 정신과 입원치료도 받았다. 퇴원 후 우리 클리닉으로 의뢰되어 온 환자였다.
급성 분열 증세는 거의 가라앉았지만 지금도 그의 생각은 비현실적인 게 많다. 정신과 약도 복용하고 상담도 받고 있지만 자기 병을 고쳐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행복뿐이라고 믿었다. 행복을 눈에 보이는 실체로 생각하여 그것을 찾기 위해 몇 년 동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행복이 있을만한 부자동네, 할리웃, 교회, 성당, 템플 등을 며칠씩 서성거려도 행복은 보이지 않았다. 행복이란 보이지 않고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는 가족들의 말도 믿지 않고 계속 배낭을 메고 행복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행복의 정체는 무얼까? 유사 이래 여러 분야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고민하고 추구해온 물음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유롭고, 편안하고, 즐거운 느낌을 주는 삶에 대한 주관적인 만족감을 행복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행복은 그 이상의 철학적, 종교적, 심리적, 과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행복의 정체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천하고 있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선의 선을 행함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가르치고, 석가는 탐욕의 사슬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는 게 행복이라 가르쳤다. 지그문드 프로이드는 본능적 원초적 쾌감을, 알프레드 아들러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지금 여기의 삶을 사는 게 행복이라 주장했다. 반면 신경과학자들은 기능성 MRI 촬영 같은 최첨단 검사를 통해 전 전두엽(앞이마 바로 뒤에 있는 뇌)이 바로 행복의 장소라 결론지었다. 행복의 정체가 이렇게 복합적 요인들로 얽혀있기 때문에 행복의 추구는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삶의 여정에는 각처에 장애물들이 놓여있다. 돈, 사랑, 권력, 명예 등의 외형적 행복, 아니면 인간애의 성취, 예술창조, 영성 같은 내면적 행복을 위해 제각기 나름대로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이렇게 무엇이 행복을 가져다주는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일반적으로 행복이란 저절로 오는 게 아니라 노력해야 얻어진다는 교육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걸고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안간 힘을 쏟고 있다. 단지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이를 성취하여 행복감을 느낀다. 대다수는 행복을 쫒다가 경쟁에 밀려 오히려 절망감에 빠지기 쉽다.
앞의 환자는 정신증세로 인해 외형적 행복만을 찾아다녔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행복은 무슨 목적을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는데서 얻어진다기보다 목적을 향해가는 순간순간의 과정이 행복으로 통하는 길인 듯싶다. 이렇게 보면 행복을 찾아다니고 있는 환자가 실은 행복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목사요, 의사 그리고 뛰어난 오르간 연주자였던 앨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빈곤하고 병든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평생 인간애를 실천한 분이다. 문둥병 환자와 정신병 환자를 치료하는 병실도 따로 만들었다. 그의 자서전을 고등학생 때 읽었다. 아마 내가 의사의 길을 걷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요즘 매주 반나절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다. 일을 마치고 나면 전에 느껴보지 못한 따스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우러난다. 그게 행복감인지 자부심인지 알 수 없지만 좋은 느낌임은 확실하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 자아 속에 묻혀있다. 자아실현을 통해 자존감을 높이다보면 행복은 슬슬 기어 나온다. 책 읽고 환자진료하고 인생체험을 하며 나대로 깨달은 생각이다.
“아무런 보상 없이 모르는 사람을 위해 봉사해보지 않고는 자신의 가치와 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슈바이처 박사의 말을 되새기며 얼마나 계속할지는 모르나 다음 주 반나절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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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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