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읍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북문인 공북루.
고창읍성은 낙안읍성 및 해미읍성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읍성으로 꼽힌다. 평지에 쌓은 여느 읍성들과는 달리 나지막한 야산을 두르고 있는 고창읍성은 모양성(牟陽城)으로도 불린다.
백제 때 고창 지역을 ‘모량부리'라고 일컬었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고창읍성의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성벽에 새겨진 각명(刻銘)으로 미루어 계유년(癸酉年)에 호남의 여러 고을 사람을 동원하여 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1453년(단종 원년)에 축조했다는 설도 있고, 축성기법으로 보아 1573년(선조 6)에 쌓은 것이라고 추측되기도 하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예로부터 고창 지역은 호남 내륙의 군사적 요충지로 서해안을 통한 왜구의 침범이 빈번하게 이어져 왔다. 이에 따라 백성들의 집과 재산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고창읍성은 전란을 겪으면서도 성벽이 비교적잘 남아 있으며, 읍성으로서는 거의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오고 있다.
성벽은 대부분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굄돌을 넣는 방식으로 쌓았으나, 초석이나 당간지주 같은 것을 깨뜨려 쓴 것도 일부분 있다.
1965년 4월1일 사적 제145호로 지정된 고창읍성은 둘레 1,684미터, 높이 4~6미터, 면적 189,764㎡의 규모이며, 동문·서문·북문 등의 3문과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 성안의 물이 통하는 수구문 등이 남아 있다.
고창읍성 안에는 관아를 비롯해 22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지만 임진왜란 등의 전란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지금은 북문인 공북루, 서문인 진서루, 동문인 등양루 및 이방과 아전들이 소관업무를 처리하던 작청, 동헌, 객사, 내아, 관청, 향청, 서청, 장청,옥사, 풍화루 등 일부 건물이 복원되어 있다.
고창읍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북문인 공북루.
2014년 7월 고창읍성 북쪽 기슭에 조성한 한옥체험마을.
■무병장수 기원하는 성벽 밟기 놀이도 이색적
고창읍성에는 척화비와 고인돌이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대원군 척화비는 병인년(1866)에 비문을 만들고 신미년(1871)에 세웠다. 당시 서양의 열강들이 무력을 앞세워 문호의 개방을 요구하자 섭정의 자리에 있던 흥선대원군은 이들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길은 쇄국정책을 펴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는데 그중 하나가 고창읍성 안에 남아 있는 것이다.
고창은 고인돌로도 이름난 고장이다. 특히 죽림리와 상갑리 일대에는 447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어 2000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고창의 명물인 고인돌이 읍성 안에도 남아 있다는 것은 퍽 흥미로운 일이다.
고창읍성은 성벽 밟기 놀이로도 유명하다. 여인들이 손바닥 크기의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돈 다음, 성 입구에 그 돌을 쌓아두었는데 이렇게 쌓인 돌은 유사시에 좋은 무기로도 쓰였다고 한다. 또한 머' 리에 돌을 이고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한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다지 허튼소리도 아니다. 1.7㎞ 가까운 성벽 길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노라면 다릿병도 낫고 자연스럽게 건강해지지 않겠는가. 이곳에 왔다면 세 바퀴는 아니더라도 한 바퀴쯤은 돌아보도록 하자. 성 위로 난 흙길을 따라 걸으며탁 트인 조망을 즐기다가 곳곳에서 만나는 옛 건물들에서 잠시 쉬어가면 절로 기분이 상쾌해질 것이다.
■판소리를 집대성한 국악의 개척자 신재효고택
고창읍성은 언제 찾아도 좋지만 늦가을 정취와 겨울 설경이 특히 빼어나다. 11월 중순 무렵이면 하얗게 핀 이삭이 곱게 빛나는 억새밭과 더불어 붉게 타오르는 단풍, 샛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그린다. 그러다가 겨울로 접어들면 눈이 자주 내리는 까닭에 성벽과 산비탈, 성내의 숲과 벌판을 은빛으로 물들인 설경이 눈부시다. 다만 눈길이 미끄러워 성벽 밟기 놀이를 즐기려면 아이젠을 착용해야 안전하다.
2014년 7월, 고창읍성 북쪽 기슭에 모양지관, 빈풍당, 은양당, 수귀당, 아관당, 동리당, 동백당 등의 고택을 복원한 한옥체험마을이 들어섰다. 전통 한옥에 묵으며 조명을 받은 고창읍성 야경을 감상하는 운치도 남다르다.
고창읍성 앞에는 신재효고택(중요민속자료 제39호)이 있다. 신재효(1812~1884)는 판소리를 집대성한 국악의 개척자로 종래 계통 없이 부르던 광대소리를 통일하여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가루지기타령, 토끼타령, 적벽가 등 여섯 마당으로 체계를세우면서 독특한 판소리 사설문학을 이룩했다. 이를 기리기 위해 신재효고택 옆에는 2001년 6월 판소리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신재효고택인 동리정사는 1850년대에 건축된 이후, 그의 아들이 1899년에 중수했다고 전해진다. 당시에는 여러 채의 건물들이 모여 있었으나 지금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초가집 인 사랑채만 남아 있다.
공북루를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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