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과 아이의 차이는 세상을 구별하는 눈일 것이다. 즉 어릴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커 보이고, 자기의 이기심 속에 담으려고 하지만 나이 먹으면 세상이란 그저 자신과 하나 되어 흘러가는 것일 뿐, 아무리 크고 아름답다해도… 자기(의 이기심) 속에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세상의 모든 아픔… 상처들이 나와 같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사람들은 그 얼마나 많은 세월을 헛된 꿈을 찾아 아파야 하는 것일까? ‘悲愴’ 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1840-1893)는 음악으로서는 성공했지만 삶은 그렇지 못 했는데 그의 사생활은 늘 우울했고, 비극적인 것이었다. 특히 마지막 교향곡 ‘비창’ 의 2악장은 춥고 고독한 겨울의 비애와 절망 속에서 피어난 한 떨기 꽃처럼 우리에게 무한한 동질감… 안식의 정서를 안겨준다.
‘비창’은 차이코프스키가 사망하기 9일 전에 발표되어 작곡가의 ‘이별곡’과 다름없었는데, 2악장만큼은 다소 다른 색깔의 음악을 들려준다. 쓸쓸하지만 외롭지 않은 음악이라고나 할까. 이름하여 알레그로 콘 그라치아(Allegro con grazia). 그저 보통 빠르기로… 우아하게 연주하라는 뜻. 왜 차이코프스키는 ‘비창’ 에 걸맞지 않은 이 알레그로를 2악장으로 썼을까? 그것은 아마도 이 2악장이야말로 가장 인생의 모습과 닮은… 고독과 비애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는 환희의 그 영원성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창’의 2악장이야말로 비감하지도, 다른 (교향곡의) 2악장처럼 처절한 아다지오로 펼쳐지는 것도 아니다. 마치 2월의 하늘처럼… ‘立春大吉’의 꿈을 안고 길 나서는 소박한 아낙네의 모습같다고나 할까. ‘비창’의 2악장이야말로 야생화처럼 초연한… 인간 차이코프스키의 모습을 그대로 비쳐주고 있다하겠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를 꼽자면 단연 시클리프다. 즉 태평양 연안을 끼고 아름다운 저택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리치몬드(지역) 서쪽… 멀리 금문교가 바라다보이는 그 곳은 미국에 와서 첫 직장이 있던 곳이기도 하였다. 식당들로 번잡한 클레멘트 거리를 조금 벗어나면 푸른 잔디들로 아름답게 조경된 저택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집들이 크고 웅장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디자인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 마치 유화들을 보고 있는 것처럼 예술적이어서 점심시간이면 늘 그 곳을 산책하곤 했다. 신문사 말단으로서, 각종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는데 직원이래야 총 6명. 직원이 적으니 한 가족처럼 식당으로 몰려가 식사를 함께하곤 했지만 걷는 것이 좋아 점심은 늘 거리로 나와 혼자 해결하곤했다.
그때 코너를 돌면 가끔 쓱 웃으며 나타나곤 했던 분이 바로 K 편집국장(당시 기자)이었다. ‘이 선생 어디를 가시나?’ 자신도 답답한 분위기가 싫어 나섰다는 듯 나의 어깨를 툭툭 치며 근처 샌드위치 샵으로 끌고 들어가곤 했는데, 그분의 미국화된 식성은 좀 거북했지만 미국화된 의식은 늘 열려 있어서 좋았다. 젊어서 첼로를 해서인지 문학과 고전음악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는데 나중에 장편소설 등을 발표, 우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안경 너머로 시니컬한 눈웃음이 인상적이었던 그는 내가 음악칼럼을 발표하자 놀랐다는 듯 손을 부여잡고 반색했는데 그때는 이미 노환으로 말을 할 수 없었고, 그저 쓸쓸히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인생은 시간여행… 망망대해의 조각배요, 잠깐 있다가는 소풍… 나들이일 뿐이지만 회한은 늘 우리를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는다. 툭툭 털고 떠날 수만 있다면, 인생은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도… 비애도 아닐지도 모른다. 차이코프스키는 1893년 교향곡 6번을 통해 그의 마지막을 정리했는데 자살을 예감케하는 비통한 1악장과는 달리, 2악장에서는 전혀 죽음의 여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자살보다는 콜레라로 사망했을지 모른다는 말이 설득력있게 들려올 만큼 2악장은 죽음과는 동떨어진 평범한 악장이다. 시적인 분위기 보다는 순음악적인 상쾌한 멜로디가 비창의 기운을 한껏 해맑게 해 주는데, 첼로의 여운이 다소 쓸쓸하긴 하지만 오히려 가벼운 마음으로 걷는 휴식… 산책의 선율같다. 보기에 따라선 한겨울 속의 봄내음… ‘비창’ 중 최고의 악장이기도 하다. 그 당시 K국장의 차에서 빵빵하게 울려오던 첼로음… 이제는 더 이상 가 볼 수 없는 그 시절… (젊음이 가슴 아팠던) 그때 그 거리가 (비창의 2악장과 함께) 떠오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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