젭 부시는 초라하게 퇴장했고 도널드 트럼프는 화려하게 비상했다. 2016년 대선 첫 달의 투표가 끝나고 정리된 공화당 판세의 의미는 단순히 한 후보의 중도하차와 한 후보의 승세에서 그치지 않는다. 유서 깊은 한 정당의 뿌리를 흔들어대는 변화를 상징한다.
공화당은 이제 새 이민과 사회적 약자에 손을 내밀려는 ‘빅 텐트 정당’의 꿈은 버린 듯하다. 부시가문이 추구해온 중도파의 온정적 보수주의는 설 자리를 잃어버렸고 표밭의 분노가 배타적인 자기민족 중심주의의 만연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미명 하에 편견과 차별과 허위와 억지를 사면 받은 트럼프의 극단주의가 공화당의 방향을 바꾸어가고 있다.
트럼프 광풍을 제외한다면 금년 공화당 대선전의 가장 큰 충격은 젭 부시의 참패일 것이다. 부시는 거의 완벽해 보이는 조건을 갖춘 후보였다. 정치명문가의 화려한 인맥을 통해 보장된 엄청난 선거자금, 본선에서 승리하려면 반드시 이겨야 할 대형 경합주인 플로리다의 인기 높은 2선 주지사로 성공적 행정 경험, 공화당의 핸디캡인 라티노 표밭을 흡수할 수 있는 친이민 성향…이처럼 돈과 경험과 지명도에 지성과 품위까지 갖춘 그는 2014년 말부터 비공식 선두주자의 위치를 여유롭게 누려왔다.
그러나 지난 6월 중순 “즐거운 캠페인”을 약속하며 공식 출마를 선언한 그의 선두주자 입지는 18% 지지율을 정점으로 한 달이 채 못가 무너졌다.
원인은 다양하게 지적되었다 : 외적 조건 외엔 카리스마도, 열정도, 웅변실력도, 차별화된 메시지도 부족한 매력 없는 후보인데다 안일한 준비부족으로 실수를 거듭했으며, 절대적일 줄 알았던 돈의 위력도 이젠 시대가 달라져서인지 신통치 않았고, 부시 피로감은 예상보다 컸으며, 돈만 쏟아부은 캠페인 조직은 사고방식에서 미디어 대응까지 구시대적이었고…
그래도 만약 트럼프가 대선에 출마하지 않았더라면 부시는 아직 선두권에 머물러있었을지 모른다. 부시 몰락 요인은 단 두 개의 단어, “도널드 트럼프”라고 아메리칸 대학의 리처드 베네데토 교수는 압축한다.
막말의 허풍쟁이 부동산 재벌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이젠 미국이, 아니 전 세계가 목격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엔 모두가 곧 사라질 사이드쇼 정도로 여겼다. 부시진영도, 공화당 지도부도 ‘너무 오래’ 그렇게 무시했다.
부시보다 이틀 뒤에 출마를 선언한 그가 한 달만에 부시를 제치고 선두주자에 올라서며 돌풍을 일으켰을 때도 그저 지나가는 바람쯤으로 간주했다. 서류미비 이민자들을 ‘범죄자’로 모욕하고 대규모 추방과 미국출생 이민자녀의 자동시민권 폐지 등 악의적 이민발언을 남발했어도 부시 등 공화당 후보들은 물론 지도부도 정면 비판하지 않았다.
그들이 외면하며 방관하는 사이 소수계와 약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기성정계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표출하는 정당한 방식으로 용인되었고 이 같은 유권자 분노에 편승한 트럼프 돌풍은 공화당 표밭을 뜨겁게 뒤흔들었다.
무력하게 엉거주춤했던 부시의 대응과는 달리 트럼프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확실한 전략을 집중적으로 구사했다고 LA타임스의 도일 맥마너스는 분석한다. 무엇보다 라이벌 들을 하나씩 타겟으로 정해 집중공격을 가했다. 첫 번째로 부시를 “에너지 부족”으로 낙인찍으며 재기불능으로 주저앉혔고 다음엔 상승세를 보이던 테드 크루즈를 겨냥, 상당부분 성공했으며 이젠 “기득권층의 새 희망”으로 기름부음 받은 루비오를 노리며 “저 땀 뻘뻘 흘리는 애 같은 친구”로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부시의 하차는 오랫동안 예견되어 온 일이지만 지난 주말 참모들에게도 5분 전에 통보되는 등 사우스캐롤라이나 경선 직후 갑작스럽게 발표되었다. 눈물을 흘리며 분개하는 지지자들도 많았다. 그들은 아무런 원칙도 없이, 구체적 대책도 없이 거친 위험발언을 쏟아내는 선동가가 어떻게 자신들의 가치관을 대변해주는 공화당의 후보, 전 세계에 미국의 정체성을 반영해주는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미국이 직면한 주요문제들에 구체적 해결책을 포함한 포괄적 통치플랜을 가졌으며 확실한 보수이념과 대통령다운 품위를 갖춘 부시가, 요란한 구호 외에는 별 대책도 제시하지 않고, 시류에 따라 보수와 진보를 왔다 갔다 하며 “결혼도 3번이나 한” 트럼프에게 참패당했다는 사실을 참담해 했다.
그러나 트럼프가 어떤 막말을 해도 지지율은 줄어들지 않았다. 허황되기 그지없는 구호만을 외쳐대도 청중들은 열광했다. “내가 5번가에서 누군가에게 총격을 가해도 내 인기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상식이하의 자기과시에도 환호를 보낸 구름청중의 뜨거운 지지는 득표로 이어졌고 트럼프는 이번 주 네바다 경선에서 45.9%라는 금년 공화경선 최고의 득표율로 압승을 거두었다.
공화당 기득권층의 절대과제인 트럼프 몰아내기는 상당히 어려워졌다. 부시가 읽어내지 못한 2016년 공화당 표밭의 민심이 점점 더 트럼프에 쏠리고 있어서다. 이런 민심도 천심인 것일까. 두 번의 수퍼화요일을 치르는 3월, 봄이 시작되면 민심도 새로워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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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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