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임덕 같지 않은 레임덕 오바마 대통령과 ‘반 오바마’로 일관해온 공화당 의회가 다시 한 번 치열한 정치 싸움에 돌입하고 있다. 아마도 오바마 퇴임 전 마지막 대결전이 될 것이다.
지난 주말 앤터닌 스칼리아 연방대법관의 갑작스런 죽음이 몰고 온 정치태풍이 워싱턴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보수 5명과 진보 4명의 9명 대법관으로 구성된 연방대법원에서 보수의 든든한 리더였던 스칼리아의 빈자리는 보통 사안이 아니다. 후임선정에 따라 대법원 뿐 아니라 미 사회전체의 앞으로 수십년 진보와 보수, 이념지형의 일대 지각변동을 의미할 수도 있다.
79세 스칼리아 보다 고령인 82세의 진보 대법관 루스 긴즈버그에게 진보 좌석을 계속 확보할 수 있게 오바마 재임 중 은퇴하라고 압박해왔던 진보진영에도 뜻밖의 상황이겠지만 보수진영에겐 예상조차 못했던 날벼락이었을 것이다. 미치 맥코넬 상원 공화당 대표가 고인에게 조의를 표할 사이도 없이 오바마의 후임지명 원천봉쇄를 선언하며 노골적 당파색을 드러낸 다급함마저 이해해 주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큰 정부, 동성결혼, 총기규제, 낙태권, 어퍼머티브 액션 등을 정면 반대하며 보수에겐 신뢰의 대상이었고 진보에겐 경원의 대상이었던 스칼리아처럼 막강한 영향력의 대법관이 떠났으니 그 빈자리를 채우려는 양진영의 행보가 필사적인 것은 당연하다.
진보와 보수의 싸움은 지난 토요일 저녁 스칼리아 사망이 알려진지 몇 시간도 채 안되어 시작되었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데이나 밀뱅크가 시간별로 전하는 당시의 상황에선 긴박감마저 묻어난다 :
충격적 뉴스가 보도된 몇 분 후 공화당의 척 그래슬리 상원법사위원장은 전화로 후임에 관해 질문하는 기자에게 아직은 그런 언급을 할 때가 아니라고 ‘합리적’ 답변을 했다. 얼마 안가 보수 트위터들이 열을 내뿜기 시작했다. 공화당 주도 상원은 오바마 지명자를 무조건 거부해야한다는 요구가 쏟아졌다. 사망뉴스 첫 보도가 나온 지 2시간이 채 안된 오후 6시41분, 맥코넬의 성명이 발표됐다 - “이 공석은 새 대통령을 맞을 때까지 채워져선 안된다.” 약 40분 후 그래슬리도 굽히고 나왔다 - “대법관 지명자는 대선의 해에 인준 안하는 것이 지난 80년의 관례다”…
그 얼마 후, 그리고 이번 주 오바마는 대법관 지명이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의 책무임을 강조하며 적절한 시기에 “반박할 여지없이” 자격을 갖춘 후보를 지명하겠다고 거듭 천명했다.
오바마와 공화당 각각의 주장에서 법적·역사적 근거는 오바마 쪽이 유리하다. 헌법 제2조 2항에는 “대통령은 상원의 권고와 동의를 받아 대법관을 임명할 권한을 갖는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2012년 재선된 오바마의 임기는 4년이다. 3년이 아니다. 앞으로 남은 11개월은 대법관을 임명하는 법적 권한을 행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대선의 해엔 대법관 인준을 안 해왔다는 공화당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도 역사가 말해준다. 1900년대 이후 10여 차례나 있었으며 현직 대법관인 중도보수 앤소니 케니디도 레이건 대통령 임기 마지막해인 1988년 상원에서 인준 받았다.
인준 청문회도, 본회의 표결도 안하겠다고 시사하며 “헛수고 말라”고 백악관 향해 으름장을 놓고 있지만 선거의 역풍을 우려해야 하는 맥코넬의 정치적 부담은 크다. “헌법상 직무를 유기하는 상원”에 대한 표밭의 반발은 대선만이 아니라 상원 주도권이 걸린 경합주의 의회선거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대법원의 진보화’를 겁내는 보수진영의 압박이 계속 가해지는 상황에서 “청문회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당내 이견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대법관 인준을 둘러싼 전투에서 숫자상으로 단연 우세한 것은 공화당이다. 상원전체 100명 중 54대 46으로 공화당이 다수다. 인준표결을 위해 필리버스터를 막아 토론을 종결시키려면 찬성 60표 이상이 필요한데 민주당이 14명의 공화이탈 표를 확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오바마 지명자의 상원인준 가능성은 제로, 결국 스칼리아의 후임 대법관 임명은 차기 대통령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렇게 연방대법원은 정치태풍의 한 복판에 던져졌다. 과거 연방대법원 이념지형의 변화는 대선결과에 좌우되어 왔다. 금년엔 대법원의 이념구도가 대선의 핫이슈로 떠올랐다. 전국의 유세장에서 민주당은 또 다른 보수 대법관이 입성하면 투표권과 낙태권, 약자의 권리와 환경보호가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강조할 것이며 공화당은 진보 대법관이 늘어나면 총기권과 종교자유가 위태로워진다고 경고할 것이다.
오바마와 공화당 의회의 대법관 지명권 대결은 워싱턴만의 정치싸움이 아니다. 연방대법원의 영향력은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에서 근로자와 은퇴자와 소수민의 권리, 이민자의 삶에 이르기까지 보통사람의 일상에도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금년 선거는 4년 임기의 대통령 선출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앞으로 30년간 봉직하며 우리 일상에 개입할 연방대법관도 함께 선택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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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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