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가 시작되고 313년이 지난 후까지도 디오클레시안(Diocletian)을 비롯한 로마 황제들은 기독교 신자들을 핍박하고 그들의 신(Roman gods)들을 믿게 하였다. 밸런타인(Valentine) 이란 신부가 감옥에 던져진 것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로마 황제 클라디우스 (Claudius II)는 밸런타인을 개인적으로는 높이 인정하여 로마 이교도 종교(Roman pagan religion)로 개종을 강요하였지만 오히려 밸런타인은 황제를 기독교로 전도를 건의했으므로 참수의 처형으로 죽음을 맞게 되었다.
처형 전 밸런타인은 감옥에서 자신을 감독 감시한 간수가 자신의 딸이 장님이라고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밸런타인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기적으로 간수의 딸 줄리아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 사형을 당하게 된 하루 전날, 밸런타인은 눈을 뜬 죄수의 딸에게 아름다운 작별편지를 썼다. 마지막 문구에는 ‘당신의 밸런타인으로부터(from your Valentine)’ 라는 인사가 써 있었다.
사형전날 쓴 편지로 그는 기독교의 따뜻한 사랑을 보여 준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죽음을 당해야했던 순교자 성 밸런타인이 처형된 날이 오늘날 날짜로 2월 14일, 바로 밸런타인스 데이라고 전통적인 전설이 내려왔다. 한 성직자의 거룩한 희생과 사랑을 추모하는 밸런타인스 데이가 오늘날에는 로맨틱한 사랑고백의 날로 변형되어 이어오기도 한다.
특히 영국 문학에서도 차우서, 셰익스피어, 스펜서 등 밸런타인스 데이를 주제로 한 로맨틱 사랑을 상징하는 작품들도 많이 있다. 수 세기가 지난 오늘날 밸런타인스 데이는 온 세계가 이날을 경축해 오고 있다.
밸런타인스 데이가 되면 생각나는 사람들이 또 있다. 결혼 전 내가 살던 아파트의 같은 층을 쓰던 이웃들이다. 옆집의 바바라는 같은 층 리차드 씨를 좋아했다. 그런데 리차드는 바바라 보다 10년쯤 젊은 여인 낸시를 사모하고 있었다. 모두 나이가 적지 않은 노인분들이었다. 유럽에서 미국에 온지 얼마 안 되었던 어린 나로서는 보기 드문 이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나이 드신 분들의 사랑이 그저 아름답게 보였던 것은 나 역시도 남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프로포즈를 받던 장밋빛 시절이었기 때문이리라.
밸런타인스 데이, 그날 낸시가 자신의 아파트에 와서 함께 축배를 들자고 젊은 우리 커플을 초대하였다. 옆집 바바라도 고운 드레스에 빨간 립스틱까지 바르고 빵을 구워서 들고 왔다. 낸시는 몇 살 젊다고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자주 입었는데, 이날도 상체가 아슬아슬 드러난 검은색 드레스에 크고 빨간 하트 모양의 리본까지 달고 우리를 맞았다.
리차드는 늘 두 여자 사이에서 행복해 하는 노신사였다. 영국계 미국인으로 몸에 밴 젠틀맨 매너가 여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비결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삼각관계 속의 노인들이 연출하는 묘한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특히 내 오른쪽 옆집에 사는 바바라는 왼쪽 옆집의 낸시를 향하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리차드를 빼앗아 보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샴페인을 한 잔씩 하니 분위기가 더 고조되었다. 갑자기 바바라가 소리를 내어서 울기 시작하였다. 준비했던 감정이 폭발한 모양이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담, 유치하고 부끄러워. 이래가지고 하늘나라에 가면 내 남편을 어떻게 볼까. 내가 바보야. 이제 이런 가면은 벗어 던질 거야” 하고 그녀는 집으로 가버렸다. 파티 분위기는 묘해졌지만 나는 바바라가 솔직하게 보여준 아름답고 연약한 인간 본연의 모습에 감동을 받고 말았다. 먼저 간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과 여성 본연의 질투와 복잡한 사랑의 감정을 나타냄을 보았다.
어린 아이에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 할 수 있는 날 밸런타인스 데이. 남편도 우리가 처음 만난 해부터 지금까지 이날은 그냥 넘긴 적이 한 번도 없이 카드, 꽃, 선물을 챙긴다. 성자 밸런타인의 성스러운 박애와 희생정신이 요즘에 와서는 많이 변색되지 않았나 생각도 하지만, 각박한 현실 속에서도 사랑을 서로 나누고 확인할 수 있는 밸런타인스 데이.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고, 또한 사랑을 받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우리 인간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행복한 날을 준 성자 밸런타인께도 감사하는 날이다.
<전춘희 (성악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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