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24년 전인 1992년 2월 대선에 출마한 빌 클린턴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 해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그곳 출신 연방 상원의원인 탐 하킨에게 한참 밀리는 3등을 해 힘이 빠진 상황에서 제니퍼 플라워스 스캔들이 터졌다. 나이트클럽 가수였던 그녀는 기자회견을 갖고 12년간 클린턴과 불륜 관계였다며 녹음된 둘 사이 대화 내용까지 공개했다.
설상가상으로 클린턴의 ROTC 입영관이었던 유진 홈스 대령은 클린턴이 월남전 참전을 피할 목적으로 입대를 면하게 해달라는 편지를 보낸 사실을 폭로했다. 민주당의 뜨는 별이었던 클린턴은 졸지에 바람둥이 불륜남에 병역기피자로 몰리게 됐다. 그와 함께 정치 생명도 끝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빌과 힐러리는 2월 10일부터 예선이 열리는 18일까지 뉴햄프셔 전역을 누비며 유권자들을 만나 “문제는 경제”를 외치며 미국과 보통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결과는 선두주자 폴 송가스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와 한 자리 수 차이밖에 나지 않는 2등이었다. ‘컴백 키드’의 신화는 이렇게 만들어졌고 이를 발판으로 그해 클린턴은 미국의 대통령이 됐다.
4년 전 아버지 부시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아이오와에서 밥 도울 연방 상원의원에게 진 그는 뉴햄프셔에서도 밀리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뉴햄프셔 주지사였던 존 수누누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역전승을 거뒀고 역시 이를 토대로 경선과 대선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여기서 이겼다고 모두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니다. 2008년 대선에서 힐러리는 버락 오바마에게 이기고도 민주당 경선에서는 졌다. 어쩌면 그해 아이오와에서 오바마는 물론 존 에드워즈에게도 진 것이 너무 타격이 컸는지 모른다.
뉴햄프셔는 여론 조사가 맞지 않기로도 유명한 곳이다. 1980년 대선 때는 CBS 여론 조사 결과 로널드 레이건이 아버지 부시에게 45% 포인트 차로 이기는 것으로 나왔지만 실지로는 27 포인트 차로 이겼다. 1984년에는 CNN 조사 결과 월터 먼데일이 6 포인트 차로 이기는 것으로 나왔지만 게리 하트가 9 포인트 차로 이겼고 1988년 도울이 각종 조사 결과 우세했지만 결과는 부시의 승리였다. 1996년 선거에서는 CNN 조사 결과 도울의 압승이 예상됐지만 실지로는 패트릭 뷰캐넌이 이겼다.
도대체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 출구 조사 결과 뉴햄프셔 유권자들의 30~45%는 선거를 사흘 앞두고, 15~20%는 당일, 지지 후보를 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투표 사흘 전 실시한 여론 조사는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다. 투표 당일 20%까지 결과가 달라진다면 여론 조사로 승자를 점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나온 여론 조사 결과는 10~20% 포인트 차로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하는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과거 예를 보면 10%~20% 우세는 별 의미가 없다. 막판에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지나 번 아이오와 코커스 때도 봤지만 트럼프 지지자는 트럼프 쇼를 즐기기는 하지만 표를 찍으러 투표장에는 잘 나오지 않는다. 아이오와에서도 트럼프는 마지막까지 테드 크루즈에 7~8% 포인트 앞서 있었지만 결과는 오히려 3 포인트 차 패배였다.
일반적으로 대선의 포인트는 가장 자격 있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는 것이지만 올해는 좀 다르다. 머리에 오만과 편견이외에는 든 것이 없는 빈 깡통 트럼프는 지난 수십 년 간 미 대통령 후보로 나온 수많은 사람 중 대통령 자격은 물론 미국 시민으로서의 자격도 가장 없는 인간이다.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모두 인간의 자유와 평등, 존엄을 존중하는 미국적 가치에 반하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이 몇 달 동안이기는 하지만 공화당 대선 후보 선두주자 자리를 지켜왔다는 것만도 수치스런 일이다.
그가 예상을 깨고 아이오와에 이어 2등을 한다면 물론이고 2등과 비슷한 1등을 하더라도 한 동안 떠돌던 트럼프 대세론은 잠들 가능성이 높다. 뉴햄프셔 유권자들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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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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