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득한듯 가물거리는 학생시절, 가끔 데모나 매스게임 같은 때 동원 된 기억이 있다. 그땐 엄청 툴툴대며 억지로 했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 강제로 동원되는 일이 없다보니 오히려 가끔은 어딘가에서 불러줘 아무 생각없이 따라다니고 싶은 때도 있다.
지난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낙태 반대 시위에 참가하게 된 것도 그런 어쩡쩡한 이유였다. 함께 바트를 타고 함께 거리를 걷고 함께 모여 기다리다 주머니에서 땅콩이며 샌드위치를 한 입씩 나눠 먹는 데 마치 소풍 나온듯 마냥 한가하고 편했다. 사실 진심으로 생명의 존엄성을 느껴 낙태를 반대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는 건 아니었다.
만약 내게 십대 딸이 있어 덜컥 임신을 했다면 아마도 쉬쉬하며 몰래 낙태를 해줄 것 같다. 많은 경우 입양을 보내는 차선을 제의 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입양아들이 자신의 탄생에 대한 끊임없는 의구심과 버림받았다는 쓰라림을 혹독히 겪는 걸 보면 그 누구에게라도 그 아픔을 겪어내며 숭고히 살라고 어깨를 두들겨 응원하는 게 교과서적 허세같아 보인다.
게다가 최근에 수없이 되풀이 듣게 되는 아동 학대의 사례들은 얼마나 소름끼치게 무섭던가. 하바드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어렸을 때 학대 받은 아이들은 뇌가 성장하는 모습마저 다르다고 한다. 임신할 만큼은 성장했지만 부모가 될만큼은 성숙하지 못한 이 세상의 수 많은 어른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한 목소리로 동의 할 명제가 부모됨의 힘겨움이다. 한 생명의 부모가 되다는 건 자신의 생이 더 이상은 자신만의 안위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혹독한 의무다.
애들이 예쁘고 소중해도 자신의 꿈을 접고 오로지 애들만을 바라보기엔 애들 키우는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직 너무 젊다. 컴퓨터 게임을 하느라고 아이를 굶겨죽인 젊은 부모, 새아빠의 손에 맞아 죽은 아이, 자기 자식을 죽인 남자와 함께 손발 맞춰 유기한 엄마, 난민 어린이를 납치해 수탈하는 인심... 세상엔 정말 상상을 넘어서는 수준의 어른이 너무나 많다.
그에 비하면 공부 못한다고 팬다거나 학원에 뺑뺑이 돌리는 극성 엄마 정도는 차라리 애교수준인 게 아닐른지. 생명의 존엄성을 생각하면 당연히 낙태 반대를 해야 겠지만 보다 실질적으로 시급한건 피임인 것 같다. 아무튼 나는 이런 어정쩡한 심정으로 시위에 참석했는데 이번 시위에 참가하기위해 샌디에고에서 차를 몰고 왔다는 가족을 만났다. 부부가 다 키도 크고 잘 생긴데다 많이 배운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애들이 고등학생으로부터 기저귀 찬 갓난 애까지 여섯이다. 애들의 태도 역시 편안했고 입성도 단정했다. 유모차의 아기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싱싱한 눈빛으로 까르르 웃는다. 딸 넷에 아들 둘. 두 아이를 키우며 온갖 죽는 소릴 했던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어떻게 그 많은 애들을 키우냐고 바보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즉각 나온 애 아빠의 대답은 간단했다.
“기도!”. 참 그렇구나. 세상을 살면 살수록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새록새록 느끼게 되면서 그 흔히 들리던 ‘기도’라는 단어가 절실해 질 때가 있다. 내가 할수 있는 일, 내가 도울 수 있는 일, 내가 타인에게 바랄수 있고 줄수 있는 일은 오직 기도 하나뿐. 때론 립서비스로 들리기도 하며 때론 생명처럼 절실할 수도 있는 그 기도 라는 한 단어.
애들을 여섯이나 둔, 아직도 한창 젊어 뵈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가 내 말문을 막히게 했다. 그런데도 보도 곳곳에는 낙태 반대의 반대를 외치는 데모대가 길길이 뛰며 마치도 시위대의 사람들이 자신을 철퇴로 치기라도 한듯 거품을 물고 소리 지른다. 이런 데모에도 저렇게 흥분하니 경찰 총에 죽은 식구를 가진 흑인들의 시위는 격렬하지 않을 수 없겠다.
온 몸의 피 한방울 한 방울이 분노의 포도처럼 알알이 터지는 속에서 침묵과 비폭력을 외친 마틴 루터 킹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을까? 군중의 힘이 무서움을 다시 느낄 수 있던 기회였다. 이런 모든 상념속에서도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 차도 한가운데를 으시대며 걷는 기분은 엄청 그럴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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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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