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 킹 데이 연휴에 잠깐 휴스턴에 다녀왔다. 휴스턴 미술관(MFAH)에서 열리는 마크 로스코(Mark Rothko) 회고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작년 9월20일 시작된 이 전시를 보고 싶어서 몇 달 동안 몸살이 났었다. 하지만 달랑 전시 하나 보자고 별 매력도 없는 도시로 날아가기란 쉽지 않아서, 비행기 예약 사이트만 들어갔다 나오기를 여러번, 그러던 중 새해를 맞아 결단을 내렸다. “그냥 가자!”
안보면 후회할거 같았다. 이제 나이도 이만큼 먹었으니, 하고 싶은 일 있으면 그냥 하고보자는 마음의 변화를 처음 실천한 여행이기도 했다. 꼭 보고 싶었는데 어영부영하다가 놓친 전시가 한둘이 아니고, 이를 두고두고 후회했던 경험들이 쌓인 데서 얻어진 결단이었다.
마크 로스코(1903~1970)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화가의 한사람이다. 형체 없이 색으로만 채워진 그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되고,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 소리와 느낌은 색채에 따라서, 또 작품의 크기에 따라서도 달라지는데 바탕에 여러 색을 칠하고 또 칠해서 얻게 된 색인만큼의 사각의 평면 캔버스에서도 숭고한 심연이 느껴진다. 인간의 수많은 감정들-고통과 슬픔, 욕망과 좌절, 희망과 공포, 우울과 기쁨이 함께 있음으로 해서 더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그의 생애 후반으로 갈수록 색은 더 어두워지는데 그만큼 더 깊어지는 체험을 할 수 있고, 검은색 화면을 벽면수도 하듯 들여다보고 있으면 죽음을 마주하는 듯한 체험도 하게 된다. 로스코가 죽고난 후 마크 로스코 재단은 그가 생전 아끼며 소장하고 있던 수백점의 작품을 워싱턴 내셔널갤러리에 기증했다. 이 전시는 그 가운데 대표적인 60여점을 뽑은 것이고, 특히 잘 소개되지 않는 검은색 작품이 많이 나왔다는 점에서 다시 만나보기 힘든 전시였다.
이 기획전은 휴스턴에 오기 전 네덜란드의 게멘테 뮤지엄과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 뮤지엄에서도 열렸는데, 한국서는 로스코에 대한 인지도가 낮아서인지 전시 제목을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화가 마크 로스코’라고, 참으로 황당하고 유치하게 달았었다. 둘다 죽었으니 망정이지, 로스코가 알았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
한가지 안타까웠던 것은 날을 잘못 잡아 그토록 기대했던 로스코와의 만남을 충분히 가질 수 없었던 점이다. 전시 폐막(1월24일) 일주일 전인데다, 연휴의 토요일이라 관람객이 너무 많아서 몰입이 불가능했다. 로스코 그림은 작품과 나와의 일대일 관계가 중요한데 일대일은커녕 조용히 천천히 돌아볼 환경이 안 되었다. 좀더 일찍 갔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 안타까움은 뮤지엄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로스코 채플’에서 충분히 보상받았다. 로스코는 휴스턴 재벌(존과 도미닉 드 메닐)의 요청으로 1964년부터 3년간 건축가 필립 존슨과 함께 그의 작품 14점을 수용하는 예배당을 지었다. 원래 의도인 유명한 예술작품이 걸린 멋진 건축물이 아니라, 로스코의 바램대로 종교를 초월한 명상과 치유의 공간으로 헌정된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평화로운 장소’라고 불린다. 2001년 미국 국립유적지로 등재됐고, 2009년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의해 ‘일생 동안 방문해야 할 가장 신성한 장소’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채플의 8각형 벽면을 모두 감싸 안듯이 걸린 14개의 검은 그림, 그 어두운 공간에 들어섰을 때 받은 느낌은 너무 영적이고 개인적이어서 쓰지 않기로 한다. 그럴 수만 있었다면 거기서 하루 종일 있었을 것이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영적인 경험은 또 한번 있었다. 채플에서 나와 지나가다가 우연히 발견한 사립미술관 ‘메닐 컬렉션’(바로 그 메닐 부부)에 들렀는데, 거기에 내가 로스코 만큼이나 좋아하는 화가 사이 톰블리(Cy Twombly)의 전시관이 따로 지어져있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럴수가, 아이처럼 좋아라하며 뛰어 들어간 그 전시장에서 받은 전율과 감동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아니 하고 싶지도 않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만하면 휴스턴은 매력없는 도시가 아니라 매력 덩어리 도시라고 해야할 것이다. 전시나 오페라를 보러 타주나 해외로 날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참 신기하고 부럽기도 했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걸 이번에 알았다. 어려운게 있다면 단 한가지, ‘마음먹기’인 것이다. 그렇게 눈을 돌리고 보니 슬슬 또 보고 싶은 전시가 생겼다. 2월14일부터 시카고 미술관에서 열리는 ‘반 고흐의 침실’ 특별전이다. 고흐는 그 유명한 침실을 3점 그렸는데 이를 한데 모은 전시회가 열리는 것은 미술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고흐의 다른 작품 30여 점도 함께 전시된다고 하니 벌써 또 마음에 달이 뜨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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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특집 1부 부장·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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