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저리두 연주하는 한인입양인 ‘엠버 필드’의 새해희망 메시지
▶ ‘나는 누구인가’ 수천번 되물었지만 친부모 찾기 좌절돼
엠버는 디저리두 연주로 자신과 타인의 고통을 치유하고 있다.
상실과 고통의 아픔, 음악활동으로 풀어내면서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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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안에 저장한 공기로 볼과 혀를 사용하여 내뿜는 엠버의 디저리두 연주(didgeridoo)를 1년전 커넥트투코리아(한국문화사랑모임) 창립식에서 처음 접했을 때 마음 밑바닥 상처를 긁어내며 서럽게 우는 통곡소리 같기도 하고, 고통의 표식 같은 동물의 울음소리처럼 들려 기이했다.
호주 원주민 악기인 디저리두가 생소하기도 했지만 한인입양인인 엠버가 보여준 연주를 그날 이후 쉽게 잊었다. 그러다 얼마전 한 요가 강좌에서 디저리두를 연주하는 그녀를 다시 만났다. 요가를 수련하는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들려준 그의 연주는 몹쓸 아픔과 직면한 후 치유의 길로 달려나오라고 권하는 주술사처럼 거침없었고, 우웅거리는 파동음이 더 큰 불안을 증폭시키면서 온몸의 세포들을 일깨웠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음악이 사람의 마음을 어디까지 치유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의 슬픔과 분노를 풀 수 있다고 답했다.
●디저리두에 매료되다
엠버 필드(40, 한국명 김숙지)는 인도에서 디저리두를 연주하는 슬로베니아 여인을 통해 운명처럼 이 악기를 만났다. “호흡을 불어넣으면 예상치 못한 원시적이고 생동감있는 리듬이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는 엠버는 “내 몸이 악기되어 리듬, 멜로디, 노래를 만들어내는 것에 매료됐다”고 말했다. 그는 “디저리두 연주할 때 사용하는 숨(breath)이 내 안에 쌓여있던 긴장을 풀어주고 차분히 안정시켜주는 힘이 있다”면서 “연주하는 동안 기쁨, 화남, 슬픔 등 모든 감정들을 토해낸다”고 이야기했다.
●친부모 찾으려 했지만...
엠버는 1975년 미대사관 직원(secretary for the US embassy)으로 서울에서 근무했던 백인여성에게 입양됐다. 결혼하지 않은 싱글맘인 양엄마는 타이완 태생의 엠버 언니를 이미 입양한 상태였다.
그녀가 친부모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가정있는 남자와 사귀던 여고생이 자신을 임신해서 낳았고 아버지에 의해 고아원에 맡겨졌다가 입양된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친부모를 찾을 만한 단서가 남아있질 않았다.
엠버는 절망했고 깊은 슬픔에 빠졌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은 이 허함은 무엇으로도 메꿔지지 않았다. 엠버는 3살 반까지 한국에서 살다가 양엄마의 전근지를 따라 네팔, 리베리아(웨스트 아프리카)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엄마가 퇴직한 후로는 일리노이주에서 성장했다.
그가 일리노이주로 돌아왔을 때가 11살이었다. 산들에 둘러싸여 평화롭고 친철했던 네팔 사람들과 달리 일리노이주는 인종차별이 심했다. 학교에 동양인이라고는 언니와 자신을 포함해 3명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엠버 얼굴에 침을 뱉고, 동양인을 비하하는 행동을 자주 해 그에게 깊은 생채기를 냈다.
나와 다르게 생긴 어머니, 나와 다르게 생긴 아이들 속에서 조롱당하면서 엠버 안에 분노들이 쌓여갔다. 또 네팔, 아프리카 등지에서 자란 영향탓인지 사람들이 엠버를 한인으로 보지 않는 것도 그에겐 힘겨웠다. 한인들조차도 엠버가 한인이라는 생각을 못했던 모양이다.
한복을 입고 있는 어린시절의 엠버. 왼쪽은 타이완에서 입양된 언니.
●한국의 땅과 산, 음악 사랑해
포모나 칼리지를 준최우등(magna cum laude)으로 졸업(1996년)하고 1999년 겨울 친부모를 찾기 위해 처음 한국에 갔을 때 추위와 황량함에 외로움이 몰려들었다. “나는 누구일까?”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으나 입양서류에 적힌 글 몇줄로는 인생의 첫부분인 조각들을 맞출 수가 없었다.
이후 2년간 샌프란시스코 닷컴회사에 다니다가 음악 공부를 위해 2002년 인도로 건너간 엠버는 비스바바라티대학교(Visva-Bharati University)에서 수학하던 중 댕기열과 내부출혈로 죽을 뻔한 일이 있었다.
그때 인도에 있던 한국친구의 한국행 권유로 2004년 다시 한국으로 날아갔다. 그녀는 2년간 SAT 교사, 음악인으로 살면서 한국에 대한 기억을 쌓았다. 엠버는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 내 뿌리가 되는 것들과 다시 연결되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었다”면서 “한국의 음식들과 문화,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들과의 생활은 즐거웠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급하고 저돌적인 한국인들의 삶의 속도에 미처 못맞춰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있었고 한국어가 완벽하게 되지 않아 답답하기도 했고, 미국식 문화와 상반되는 일들에는 혼란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엠버는 자신이 한인이란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그녀는 “한국의 문화유산과 열정, 역동성, 끈기를 사랑하며, 한국의 땅과 산, 바다, 음식, 음악, 무용, 한글알파벳 등을 사랑한다”면서 “내 유전자에는 고난과 싸워온 용감하고 치열했던 조상들의 전사(warriors)의 피가 흐른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을 키워준 가족에게도 감사했다. “여러나라에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사랑으로 돌봐준 양엄마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면서 “입양됐다는 상실감과 입양가족을 얻은 기쁨, 두 가지로 인해 나는 타인의 고통과 아픔, 사랑의 의미를 더 잘 헤아리게 됐다”고 말했다.
●타고난 창의성 발견하도록 도와
엠버는 11년간 피아노를 배운 이후 인도 대학에서 타블라(드럼)와 에스라즈(Esraj, 타악기) 등 인도 고전음악을 공부했다. 2006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엠버필드뮤직(Amber Field Music)을 세우고 개인, 그룹 레슨을 진행하고 있다. 엠버는 “공연을 통해 내 안에 차있는 감정들을 쏟아내고 관중들과 교감을 나눌 때 행복하다”면서 “사람들이 타고난 자신의 창의성과 음악성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말했다.
또 “내 음악 중심에 흐르는 슬픔과 상실은 친부모와 엄마의 나라를 향한 그리움의 표출”이라면서 “나를 힘들게 했던 상처들과의 화해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엠버는 한국어를 더 잘하고 해금, 장구뿐 아니라 다른 한국전통악기도 더 배우고 싶은 소망을 갖고 있다. 그래서 2013년 서강대에서 3개월간 한국어프로그램을 마쳤고 옹경일 무용가로부터 삼고무를 배워 지난해 SF한국의날 축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그녀는 “신문에 내가 나오면 혹시라도 친부모에게 연락이 있을지 모른다”면서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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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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