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위해 쓰는 것보다 남 도울 때 더 기뻐
▶ “받은 것 환원”“사회 변화” 돈·시간 쓰는 ‘기부천사들’
은퇴자들은 삶의 만족도가 상대적으로 높다. 비결은 하나다. 욕심을 버리고 시간과 에너지를 남을 돕는데 집중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말에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고 했다. 따듯한 ‘나눔의 삶’에 치우치다 본인이 추워지는 경우다.
자선행위는 은퇴자들을 기분 좋게 만든다. 인구노화 전문 연구업체인 ‘메릴린치 앤 에이지 웨이브’가 은퇴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새로운 서베이에서 응답자들의 76%는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것보다 남을 돕는 것이 훨씬 기분 좋은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미국의 은퇴자 수는 25세 이상 전체 인구의 31%지만 자선단체에 내놓은 기부금의 42%, 자원봉사에 투입하는 시간의 45%를 담당한다.
에이지 웨이브의 사장 겸 최고경영자(CEO)인 켄 다이치트월드는 “은퇴를 남을 돕는데 주력하는 시기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만 서베이에 응한 참여자의 3분의 2는 은퇴기야말로 우리가 받은 것을 사회에 환원하는 최상의 시기로 꼽았다”고 말했다. 은퇴자들의 의식에 큰 변화가 일어난 셈이다.
3,6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서베이에서 자선단체에 기부를 한 은퇴자들의 59%는 강력한 목적의식을 느꼈다고 말했다.
다이치트월드는 앞으로 20년에 걸쳐 점차 늘어나고 있는 노인층의 돈과 시간의 기부는 총 8조달러어치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부유층 고객들의 자산과 투자를 관리해 주는 메릴린치의 프라이빗 웰스 어드바이저 벅 윌리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은퇴자들의 목표는 앞으로 더 이상 골프를 치지 않겠다든지 조개껍질이나 수집하며 말년을 보내겠다는 따위가 아니다”며 “많은 은퇴자들이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주고, 변화를 일으키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매니지먼트 컨설팅업에 종사하다 은퇴한 데보라와 알랜 맥아더 부부는 직장을 그만두기 전부터 ‘기부천사’였다.
맥아더 부부는 은퇴 후 미국 최대의 비영리 자선기금 단체인 ‘유나이티드 웨이’의 프로그램에 참여, 일탈 위험성이 높은 청소년들을 지원하는데 앞장섰다.
데보라 맥아더(53)는 “나와 남편은 잉여자산이 생길 경우 전액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일찌감치 뜻을 모았다”며 “20년 전의 결정대로 자선사업에 주력하며 여생을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데보라는 그러나 “자선단체에 낸 기부금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 다르게 사용되기 일쑤였다”면서 “구체적으로 저 아이, 혹은 저 사람에게 도움을 주려면 중간단계를 거치지 않고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모로코를 방문한 이후 맥아더 부부는 아예 현지로 이주, 그곳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직장을 잡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들은 또 수백만달러를 투자해 북미 지역에서 가장 큰 외국인 학교를 세우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알랜 맥아더(56)는 “기부를 할 때 노후자금을 홀랑 날리지 않도록 치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맥아더 부부도 한때 재정설계사로부터 “이런 식으로 기부를 계속하다간 노후자금이 고갈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결국 궁리 끝에 이들은 미국에서 교육 받은 모로코인들이 본국에서 지도자적 위치에 설 수 있도록 컨설팅과 트레이닝을 제공하고 인재를 스카웃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부유층 고객에게 재정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메릴린치의 어드바이저 윌리는 “401(l)나 IRA, 소셜시큐리티 연금 등 그 어떤 것이건 상관없지만 누구나 은퇴 후의 생활에 대비한 확실한 플랜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 가면 어떻게 되겠지”라는 안일하고도 막연한 생각은 일찌감치 털어내야 한다.
그는 “자선사업이 좋은 일임에 분명하지만 본인의 노후 보장책부터 마련해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버지니아주 리스버그에서 활동하는 공인 재무설계사 보니 시웰은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은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바람직하고 근사한 일이지만 그 대가로 본인이 파산상태에 빠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녀의 지론에 따르면 “무작정 퍼주기 좋아하는 기부천사들의 돈은 풍선에서 바람이 새듯 소리 소문 없이 빠져 나간다.”사실 계통 없이 여기저기에 기부금을 흘리고 다니는 은퇴자들이 적지 않다.
성탄시즌마다 등장하는 구세군 냄비에 큰돈을 떨어뜨리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은퇴노인들이다.
고급 식당의 계산서에 찍혀 나오는 특정단체 후원 요청에 선뜻 응하는 고객들의 대부분도 이들이다.
이들은 또 값비싼 입장권을 구입해야 하는 호화판 연말 자선파티의 ‘고정 손님’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남을 돕는 재미에 사는 ‘기부 중독자’들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관련, 시웰은 “본인의 의도대로 원하는 곳에 기부를 하는 것은 좋지만 반드시 지갑에서 빠져나가는 돈을 꼼꼼히 계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녀는 “기부에 맛을 들인 사람들은 더 줄 수 없을 때 우울해 한다”며 “그러나 돈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 시간을 기부하는 것도 은퇴자들에겐 보람찬 일이 아닐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제한된 노후자금을 퍼주는 대신 은퇴자들의 가장 큰 여유자산인 시간을 기부하라는 충고다.
일리노이주 록포드의 공인 재무설계사인 그랜트 무어는 개인 차원의 기부보다 ‘은퇴자 조언기금’(DAF)을 이용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미국 기부금 제도의 특징은 계획 기부가 일반화되고 있는 점과 다양한 기부 프로그램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계획 기부는 일시적·즉흥적 기부가 아니라 기부 대상과 기부 금액, 기부 방법 등을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하는 기부 제도다. 계획 기부에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기부자 조언 기금이다.
이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는 것은 기부자가 기부 재산에 대해 다양한 사용조건을 달아 기부액을 통제할 수 있고 소득세 공제, 자본 이득세 절세, 상속세 감면 등 세제혜택이 많으며 기부자 또는 기부자가 지정한 수취인에 대한 안정적 연금지급 등 매력 있는 상품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그는 그러나 “은퇴 후 초반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며 “처음부터 너무 후하게 내주다가 나중에 본인이 파산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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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경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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