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새 반세기쯤 전의 이야기가 됐다. 크리스마스때 대연각이라는 호텔에서 불이 났다. 호텔은 좁은길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소방차의 접근이 어려웠다.
멋진 부츠와 코트를 차려입은 젊은 여자가 곡예를 하듯 날름거리는 불길을 요리조리 피하며 창문턱에 매달려 있었다. 그녀의 한동작 한동작에 마다 사람들은 한숨처럼 탄성처럼 안타깝게 소리를 질렀다. 여자는 낙엽지듯 떨어지고 또 다른 방 안에는 젖은 담요를 뒤집어 쓰고 간간히 창너머 밖을 내다보는 이가 있었다. 얼마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그가 견디다 못해 쓰러진건가, 죽은 건가, 보는 사람들을 애타게 했다. 일본인이었던 그는 사람들의 환호속에 드디어 구해졌다.
그러나 병원에 실려 얼마 안가 숨을 거뒀다. 헬리콥터는 치솟는 연기때문에 가까이 가지를 못하고 옆 건물 옥상으로 피해 간 사람들에게 밧줄을 내려뜨렸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누군가가 밧줄을 붙잡았다. 대롱대롱 매달려 가던 이는 그러나 기력이 다해 그만 줄을 놓고 그대로 떨어진다. 눈을 떼지 못하고 조마조마 바라보던 이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떨어질 때마다 비명에 가까운 탄식을 내뱉는다.
갓 스물이던 그 때의 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밧줄을 놓는다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껌처럼 붙어있지... 고약처럼 엉겨있지... 어떻게 줄을 놓을 수 있는거야. 죽어도, 죽인데도 그대로 붙어 있어야 하잖아... 반세기가 지난 이 시점에서 내게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나는 안다. 내게 밧줄을 잡을 기운이 없음을. 전쟁통에 생이별을 하게 된 이산 가족들의 이야기는 대체로 비슷하다. 노인네가 피난을 안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노모를 혼자 남겨두고 갈수 없어 어머니 모시고 잠시 견뎌보라고 아내를 떨구어 놓은 사정. 거기다 젖먹이는 엄마가 필요하니 젖먹이까지 두고 피난 왔다가 영영 생이별하게 된 사연들.
젊었을 때 그런 사연을 접하게 되면 ‘노인들이 가자고 하면 순순히 따라나설 일이지 웬 고집을 부려 젊은 이들 애 먹이시나, 들..’ 했었다. 그런데 만약 지금 그런 상황이 내게 벌어진다면 나 역시 ‘얘들아, 나는 기운 없다. 그 고생길을 나서느니 차라리 앉아서 죽겠다.’ 하고 주저 앉았을 것 같다. 이해하려 아무리 애써도 도저히 이해할수 없던 일들이 그 긴 세월을 살아본 후에는 아무 설명없이도 이해가 된다. 세월의 힘이란게 얼마나 도저한 것인가. 세월의 힘을 이길 이 누가 있으려나.
그런 세월이 또 한 해 간다. 우물쭈물 하는 새에 내 이럴 줄 알았다고 탄식한 게 버나드 쇼 였던가? 그가 말하는 ‘이럴 줄’ 이 무얼 말하는 건지 또렸하지는 않지만 연말을 맞는 내 심정 또한 낭패한듯 무릎을 치고 싶다. 언제나 처럼 한 해가 시작한 게 어제 같은데 잠깐 새에 맞게 되는 연말. 이제는 내가 한번 속지 두번 속으랴 하고 설레지도 실망하지도 않으려 한다. 아니 설렘도 실망도 아무 것도 느끼지도 않으려 마음 다져 먹는다. 하지만 그래도 나오는 말, 정말 세월은 너무 빨리 간다. 한해에 열두 달이 있는 게 아니라 일월과 12월만 있는 것 같다.
그런데도 새해엔 무얼 소망할까를 생각한다. 해마다 새해가 되면 일기를 착실히 쓰고 싶다고 굳은 결심을 하는데 늘 두어 달이 지나면 흐지부지 된다. 그래도 또 다시 새해엔 일기를 쓰리라, 다짐한다. 새해에는 일주일에 세번은 걷기를 또 다시 시작 할 것이고 새해엔 독설대신 덕이 있는 말을 할수 있기를 기원한다.
매일 단 한구절이라도 글을 쓸수 있기 바라며 매일 크레용으로 원 하나를 그리더라도 그리기를 다시 다짐한다. 시기하지 말기를, 부러워 하지 말기를, 게으르지 말기를, 서두르지 말기를, 한숟갈 덜 먹을 수 있기를, 어제를 돌아보며 자괴감에 빠지지 말기를, 내일에의 욕망 때문에 현재를 잊지 않기를, 덜 말하고 더 듣기를.
이제 다시 오는 세월도 아무 말없이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리라. 이 나이에 뭘 또 더 배울게 있노, 싶지만 사실 배워야 할 것은 무궁무진하다. 일생을 걸쳐 오늘 이 순간만큼 나이 먹어 본적이 없기에 나의 늙음은 새롭다.
<
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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