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령자 노린 사기극 빈발-가해자는 변호사·재정상담사·친지 등 면식범
▶ 외로운 노인에 접근 환심, 처벌하기도 어려워…위임장 등 평소와 다른 모습 땐 의심해 봐야
시애틀에 거주하는 미망인 마리아나 쿠퍼는 재정압박이 심해져오자 덜컥 불안감이 들었다. 충분하지는 못해도 노후를 팍팍하게 보내지 않을 정도의 은퇴자금을 비축해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한 것만 같았다.
내심 두려워하는 일이 행여 현실로 확인될까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손녀딸에게 노후자금의 대부분을 사기당한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쿠퍼(86)의 등에 칼을 꽂은 적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그녀는 서로 맘속을 뒤집어 보일만큼 친한 친구라 여겼던 자넷 보믈에게 3년에 걸쳐 최소한 12장의 수표를 써주었다. 총액으로 21만7,000달러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이 중 일부는 친구의 요청에 따라 빌려준 것이었고, 나머지는 집안 수리비용 등의 명목으로 건네준 것이었다. 그러나 절친은 빌려간 돈을 되갚지 않았다. 마치 블랙홀처럼 보믈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 돈은 다시는 빠져나오지 않았다. 물론 집안 수리는 한 건도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 11월1일 자넷 보믈은 9개 항목의 중절도 혐의로 기소됐다. 선고심은 11일로 예정되어 있다.
쿠퍼는 친구 덕에 집을 날린 후 지금은 실버타운에서 생활한다.
쿠퍼처럼 가까운 친구나 변호사 혹은 재정상담사 등에 의해 금전적 피해를 입는 고령자의 수는 매년 500만명에 달한다.
향후 10년간 미국에는 하루 1만명이 65세 고지에 오른다. 그리고 시니어의 공식 반열에 편입된 이들 모두가 고령자들을 노린 사기극의 잠재적 피해자다.
법무부가 재정지원을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65세 이상의 성인 20명 중 한 명이 최근 재정적으로 부당한 취급을 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고령자를 돕기 위해 가족과 친구들은 재정적 학대를 가리키는 경고사인이 없는지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아야 한다.
평소엔 검소하기만 하던 노인네가 웬 바람이 들었는지 펑펑 돈을 쓴다든가, 가족들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비싼 선물을 사주는 것은 경고사인에 해당한다.
가족들과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자신이 아는 사람에게 위임장을 덜컥 작성해주고, 전혀 관계가 없는 타인에게 부동산 명의를 이전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노인네에게 접근해 옆구리를 찔러대는 것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혼자 사는 고령자는 귀가 얇아지게 마련이다.
무료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독거노인은 자신의 간병인이나, 잘 모르는 사이인데도 곰살궂게 대해 주는 ‘수상한 이웃’에 금방 마음의 빗장을 풀어준다. 멀리 사는 딸보다는 이웃집 여자가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세상이 험하다 보니 ‘착한 사마리아인’ 같은 이웃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험악한 세상에 노인은 ‘봉’이다. 인지능력이 떨어지고 감정적 기복이 심하기 때문에 ‘전문가’에겐 열린 금고와 다를 바 없다. 아예 노인들만을 전문으로 공략하는 사기조직만도 한두 개가 아니다.
은퇴자들을 대상으로 한 사기가 하도 기승을 부리다 보니 이를 다룬 책도 여러 권이 나온 상태다.
소비자 재정보호국(CFPB)과 연방 예금보험공사가 공동으로 펴낸 ‘Money Smart for Older Adults’라든지 CFPB와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제작한 ‘노후계획’ 등이 대표적이다. 연방 법무부와 보건후생부가 함께 손잡고 준비한 ‘The Elder Justice Roadmap’도 읽을 만하다.
한 가정의 아내가 살해를 당하면 자동적으로 용의선상에 오르는 인물은 남편이다. 마찬가지로 노인 사기극이 발생했을 때 가해자는 가족이나 친구, 혹은 친지다. 평소 가까이 지내던 ‘면식범’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이들이 저지르는 착취는 대부분 사적인 문제로 치부되곤 한다. 법원으로 가져가 봤자 가벼운 벌금형이 떨어지거나 아예 기각되기 일쑤다. 형사재판은 받기가 힘들고 대부분 민사로 처리된다.
쿠퍼의 경우처럼 액수가 만만치 않은 케이스라 해도 사법처리를 기대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우선 법적으로 상당히 복잡한 문제인데다 경제적 착취행위가 은밀하게, 긴 시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행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증인이나 증거도 없고, 정확히 몇 차례에 걸쳐 어떤 부당한 행위가 이루어졌는지 알지 못하니 기소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다.
보통 은퇴기금에서 야금야금 돈을 빼먹기 때문에 사단이 난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은 때이다.
쿠퍼를 예로 들어보자. 쿠퍼는 2008년 초반에 보믈에게 3,000달러짜리 수표를 써주었다. 무슨 명목이었는지는 기억도 못한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쿠퍼는 보믈에게 자신의 재정관리와 관련한 위임장까지 써주었다. 물론 손녀딸은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2012년 초, 쿠퍼는 연이어 돈을 가져간 바믈이 단 한 번도 변제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서서히 조바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지붕을 수리해야 할 일이 생기자 쿠퍼는 바믈에게 집 천장을 새로 고쳐야 하니 빌려간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바믈은 돈을 빌려간 적이 없다며 펄쩍 뛰었다.
정신이 바짝 든 쿠퍼는 지체 없이 손녀딸 에이미 레코크에게 연락을 취했다.
할머니의 하소연을 들은 레코크는 즉시 경찰에 연락을 취했다.
바믈은 중절도 등의 혐의로 기소돼 재판정에 섰지만 11일 선고공판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미지수다.
보믈은 살림살이를 도맡아 정리해 주고 재정 서비스를 해주는 대가로 쿠퍼에게서 얼마 안 되는 수수료를 받았을 뿐이라고 밝혔다.
그녀는 또 가계를 효율적으로 이끌어가고 금전관리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쿠퍼에게 위임장을 작성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이 과정에서 부당하게 압뱍을 가하거나 협박을 한 적 없다고 주장했다.
생애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노년기라고 한다. 붉게 타는 노을은 황홀하다. 하지만 황혼녘을 넘긴 사람의 뒷모습은 처연하고, 초라하다.
레코크의 말대로 “언젠가 우리 모두가 가야 할 자리”다. “나이든 은퇴자들에게 가하는 정신적, 물리적, 경제적 압박은 본인의 동의여부에 관계없이 모두 학대로 보아야 한다”는 그녀의 지적은 천번만번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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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경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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