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6월초, 미국은 나치독일을 피해 도망쳐온 유대인 난민선의 입국을 불허했다. 거부당한 배는 유럽으로 되돌아가야 했고 900여명 난민승객 중 250여명은 얼마 후 홀로코스트 광풍에 희생당했다. 미국 인권역사의 큰 오점으로 기록된 사건이다.
당시 대공황 후의 경제 불안과 반유대인 정서에 편승해, 난민으로 가장한 공산주의자와 나치스파이 잠입 루머가 공포를 조장하면서 미국여론의 60%이상이 유대계 난민수용을 반대했었다.
연방상원이 이 실책에 대한 유감을 담은 결의안을 채택한 것이 불과 몇 년 전인데 다시 절박한 난민들의 미국입국을 막으려는 정서가 확대되고 있다. 어제 발표된 블룸버그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시리아 난민수용을 반대하는 응답자가 53%로 과반수를 넘어섰다.
보통사람의 평화로운 일상을 야만적으로 파괴한 극단주의 무장집단 ‘이슬람국가(IS)’의 파리테러를 목격했고 다음 차례가 워싱턴이라는 협박까지 들은 미국인들이 테러 공포에 사로잡힌 것은 당연하다. 지난 한 주 충격과 불안감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웠던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이 공포를 정치적 기회로 이용하려는 일부 정치권의 행태는 위기의 시대에 미국의 리더십을 자처하는 인물들의 수준을 의심케 하고 있다.
공화당 대선주자들과 28개주 주지사들에 하원의장까지 가세해 오바마 대통령의 시리아 난민수용 계획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파리테러범 중 일부가 난민으로 입국한 것이 알려지면서 더욱 강경해졌다. 세계를 뒤흔든 테러가 발생했고 대규모 난민유입이 테러리스트의 잠입로처럼 보이기 쉬운 상황에서 난민심사를 강화하는 것은 필요한 조처일 수 있다. 그러나 갑작스런 전면중단의 근거가 되기는 힘들다.
오늘 난민수용 일시중단 촉구법안을 표결에 부치겠다는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나 수용거부를 선언한 주지사들은 “안보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될 때까지 어떤 난민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천명하고 있다.
미국의 난민심사는 상당히 엄격하다. 요즘의 유럽처럼 도착 후 심사가 아니다. 평균 18개월 동안 철저한 검증을 거친다. 국토안보부와 FBI를 포함한 최소 4개 부처에서 신원조사와 수차례의 인터뷰를 거듭하여 통과여부를 판가름 하는데 일단 결정되면 항소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성과도 좋다. 9.11 테러이후 미국은 75만 4,000명의 난민을 받아 들였으나 테러범은 한명도 없었다.
그런데도 합리적 대안 제시가 아닌, 외국인 혐오증을 부추기는 선동적 극단주장이 공화당 대선판에서 난무한다.
“5살 이하의 고아까지” 포함해 모든 시리아 난민을 거부한다고 선언한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 “정신 차려라, 중동음식 냄새 난다”는 마이크 허커비 전 주지사 등은 오바마가 난민을 입국시키면 자기가 당선되어 “모조리 추방시키겠다”는 도널드 트럼프와 함께 막말주자로 접어둔다 치자.
더 곤란한 것은 젭 부시와 테드 크루즈의 이른바 ‘종교 심사’로 기독교인만 골라서 받아들이자는 ‘비 미국적’이며, 헌법에도 위배되는 편견이다. 기독교인들이 중동에서 박해를 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무슬림을 포함한 난민 대부분이 다른 종파라는 이유로 기독교인 못지않게 고통당하다 살해위협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다. 고의는 없었다 해도 이처럼 경솔한 과잉반응은 ‘무슬림 대 기독교인’의 반목, ‘문명 충돌’이라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IS가 원하는 것이 바로 테러라는 야만행위를 ‘문명의 충돌’이라는 거창한 컨셉으로 포장하는 것”이라고 상당수 중동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테러를 통해 공포와 불안, 분노의 확산으로 서방세계가 무슬림 주민과 난민을 적대시하기를 노리는 이들에겐 테러 후 고조된 ‘반 무슬림’과 ‘반 난민’ 정서를 이용해 ‘우리 대 그들’의 대결을 기정사실화한 후 서방세계와 이슬람의 지구 종말적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궁극적 목표라고 브루킹스 연구소의 샤디 하미드박사는 설명한다.
테러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당신은 안전하지 않다, 정부는 당신을 보호해주지 못 한다”라고 정리된다. 이 같은 공포에 사로잡혀 자칫 어리석은 과잉반응을 하는 것은 개인뿐이 아니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난민수용 중단도 그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래서 IS의 진정한 무기는 바로 ‘공포’라고 온라인 뉴스해설 매체 복스(VOX)는 분석한다. IS는 전쟁에서 미국을 이길 수는 없지만 미국민을 두렵게 하여 IS의 위치를 격상시키고 미국의 위상과 가치관을 손상시킬 수는 있다는 것이다.
IS가 노리는 테러 공포에 대한 과잉반응의 결과는 한마디로 압축될 수 있다 - “IS는 승리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은 패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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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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